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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권 개인전

2021.07.01-2021.07.31

Information

<전시소개>

 사람을 길게 늘리거나 납작하게 만들어 착시를 일으키는 조각으로 유명한 이환권 작가가 이번에는 한 차원 더 새롭게 변화한 신작을 선보입니다.

이번에는 '그림자'를 테마로 하여 오랜 시간 작가의 실존과 허구에 대한 고민을 압축하여 담았습니다. 이차원의 그림자로부터 살아 숨 쉬는 듯한 삼차원의 인물까지 작가만의 고유한 시각으로 재탄생된 여러 인물과 사물은 전시장 안에서 실존과 허구의 경계를 절묘하게 넘나들며 보는 사람에게 기묘한 감각과 호기심을 유발하고, 자신이 바라보는 현실 자체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이환권 작가는 동시대의 보통 사람들이 가진 내면을 함께 고민하고 작품으로 풀어내어, 대중들에게는 물론 세계적인 컬렉터들까지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부재, 흔적 그리고 허상 - 이환권의 그림자 미학 

임성훈(미학, 미술비평)

프롤로그

제임스 조이스는 《죽은 사람들(The Dead)》에서 “부재는 현존의 최고 형식(Absence, the highest form of presence)”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의 의미를 여기서 상세하게 논할 수는 없지만, 이환권의 그림자 작업의 지향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현존에서 부재가 현시되기는 하지만, 그렇게 강력하지는 않다. 그런데 부재는 그 무엇보다도 현존을 매우 강력하게 환기시킨다. 이러한 환기 속에서 예술적 상상력은 고양되고 상승된다. 이환권의 그림자 작업은 부재를 통해 이루어지는 현존의 조형성을 보여준다. 그림자는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엄연히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그림자는 흔적이다. “흔적이 느껴진다”라는 이 익숙한 표현은 부재하지만 현존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이다. 흔적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한 감성의 아우라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러한 흔적 또한 허상으로 돌아간다. 그림자로서의 부재는 현존을 불러오고, 그 현존에서 그림자로서의 흔적으로 남지만 결국 그림자는 허상이다. 이환권의 작업은 부재를 통해 현존을 조형적 흔적으로 보여주면서 허상의 아름다움을 그림자 미학으로 제시한다.  


그림자, 흔적으로 남는 것

흔적에는 이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애당초 흔적은 경계를 갖고 있지 않다. 마치 수채화 물감이 종이 위에 번져가고 흘러가듯이 말이다. 이환권의 작업에서는 오롯이 흔적만이 제시될 뿐이다. 그러기에 심지어 이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따져보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다. 흔적은 현실적인 것도 아니고 비현실적인 것도 아니다. 흔적은 그저 표면에 긁히거나 남아 잇는 그 무엇처럼 의미와는 부단히 거리를 두고 있는 어떤 것이다. 물론 조각이 아무리 흔적으로 남는다 해도, 그것은 결국 조형적 흔적이다. 조형적 흔적은 현실적인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비현실적인 것이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그림자로서의 흔적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이러한 비현실성의 현실성 또는 현실성의 비현실성은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조각적 공간이나 매스로 포착되기는 어렵다. 흔적에 대한 조형성은 그러기에 껍질에 비유될 수 있을 터이다.   
   흔적은 알맹이가 아니라 껍질로 표상된다. 벼이삭을 홀태에 끼워 훑어내고, 절구에 넣어 껍질을 벗겨내면 쌀이 된다. 그런데 작가 이환권은 쌀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탈곡과 도정의 과정에서 분분히 흩날리는 껍질, 마치 중력을 거스르듯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껍질에 관심이 더 있는 듯 보인다. 쌀만이 진짜이고 껍질은 가짜일까? 그러나 껍질이 없었다면 쌀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쌀의 원인은 오히려 껍질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럼 껍질의 원인은 무엇일까? 모른다. 껍질은 껍질일 뿐이다. 껍질은 인과성의 범주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이환권 작가의 조각 연작을 보고 있노라면 평소에 가졌던 가짜와 진짜에 대한 생각이 모호해지고 흔들리게 된다. 사라지는 것을 붙잡기만 하고, 가벼운 것을 견디지 못해 중력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 그런 우리가 이제 부재의 강력한 조형적 힘을 느낀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껍질과도 같은 작품에서 오히려 현실에서 비롯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이 세상을 어쩌면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를 두고 보이는 모든 것이 다 헛것이라는 식의 상투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한 이해는 이환권의 그림자에 대한 오해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그림자, 이환권의 그림자

그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그림자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얼굴에 그림자가 있다’라는 표현이 그 한 예일 터이다. 그림자는 부정의 기호로 오랫동안 인식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림자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이는 플라톤이다. 널리 알려졌듯이, 플라톤은 《국가》 7권 ‘동굴의 비유’에서 그림자를 비판한다. 그림자는 참된 세상, 그러니까 진리의 이데아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어둠 속의 이미지이다. 그림자 이미지는 사람들을 미혹에 빠트린다. 진리의 자리에 허상이 자리를 잡고 사람들을 속인다. 그림자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어리석다. 진짜는 동굴 밖에 있는데, 가짜를 진짜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굴 안은 믿을 수 없는 감각의 세계이다. 그러기에 플라톤은 이성(logos)을 따라 가짜 그림자인 감각의 세계에서 벗어나 진짜의 세계, 곧 동굴 밖으로 나가라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플라톤이 현실의 사물 또한 가짜라고 본다는 점이다. 물론 그림자보다는 덜 가짜이지만, 어차피 가짜인 것은 사실이다. 현실의 사물이든 그 사물의 그림자이든 간에 모두 가짜인 것이다. 사실 이런 점에서 역설적이게도 이환권의 작업은 플라톤적이기도 하다. 사물의 형태를 그림자로 보여주고는 결국 이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것이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이환권의 작업은 전혀 플라톤적이지 않다. 플라톤에게 모든 사물은, 그것이 현실의 사물이든 그림자이든 간에 상관없이, 이데아의 에이도스(eidos), 달리 말해 사물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원형의 모방이다. 그런데 이환권의 조각에서는 원인이라는 개념이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그림자의 원인은 현실의 사물도 아니고 에이도스, 곧 이데아의 원형도 아니다. 그림자는 그 자체로 부재하면서 현존하는 흔적으로서만 표상되는 허상이다. 허상은 가짜 이미지이지만 진짜 이미지와의 연관성 속에서 파악되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그냥 허상인 것이다. 허상은 의미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의 긴장 속에서 다양한 상상력을 촉발한다. 허상의 이름은 의미가 아니라 흔적이며, 부재함을 통해 현존함을 기억하고 회상하게 한다. 작가 이환권은 이러한 부재와 현존 사이에 있는 긴장을 감각적으로 포착해 조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림자로서의 허상과 조각의 본질 

이환권의 그림자는 원인 없는 결과로 부재하면서 현존한다. 여기서 의미들은 껍질과도 같은 형태 속에서 사라진다. 물론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허상이 허상일 수 있는 것은 의미가 가끔씩 불쑥 튀어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 또한 다시 가벼운 껍질처럼 사라질 듯 흩날린다. ‘무엇’이 있기에 그림자는 드리워진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무엇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이다. 무엇이 있기는 하지만, 그 무엇을 경험 속에서 개념적으로만 알 수 있을 뿐, 무엇 그 자체를 알 수는 없다. 칸트는 이러한 무엇을 ‘사물자체(Ding an sich)’라고 불렀다. 이환권의 그림자는 이런 점에서 한편으로 주목할 만한 시각성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으로 흥미로운 조형적 형이상학을 제시한다. 허상으로서의 그림자는 사물이 사물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강력한 조형적 흔적이기 때문이다. 진짜와 같은 가짜이든, 가짜와 같은 진짜이든 간에 모든 것은 허상으로 귀결된다. 허상이 흔적으로 남겨진 것, 그것이 이환권의 그림자 조각이다. 작품을 두고 단지 착시나 착각을 유도하는 기법적인 독창성이나 시각적인 즐거움만을 읽어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허상은 왜곡과 과장의 형태로 나타난다. 아니 어쩌면 나타나는 그 모든 것, 심지어 작가가 사용하는 재료인 PLA(Poly Lactic Acid)도 왜곡이자 과장이며, 결국 허상이다. 이 모든 것이 다 허상이라면, 허상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그림자로서의 허상은 본질에 대해 비본질인 것이며, 중심에 대해 주변적인 것으로만 간주되곤 한다. 조각사에 등장하는 많은 조각가들은 본질에 중점을 두었기에 인체의 표현에 있어서도 비례와 균형 그리고 조화를 추구한다. 그리스의 조각가 폴리클레이토스의 <카논>이나 르네상스 조각가들이 중시했던 ‘형태가 잘 갖추어진 인간(homo bene figuratus)’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로댕 이후 현대조각에서도 이전과는 그 양상을 달리하긴 하지만 여전히 본질이 중심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현대의 추상조각에서도 조형적 ‘본질’이 그 핵심이 아니던가? 이환권은 언제나 중심에 있었던 본질이라는 조형적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한다. 이러한 시도는 비본질적이고 주변적인 것으로만 여겨졌던 그림자를 주제로 한 작업에서 이루어진다. 흔히 조각의 본질과 연관해서 공간이나 매스 그리고 구조가 중점적으로 논의되곤 하지만, 그림자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거나 있다하더라도 빛과 연관해서 부수적으로만 다루어질 뿐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림자야 말로 본질적인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림자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유령이듯이 말이다. 물론 작가 이환권은 조각의 본질을 묻는 작업에 천착하는 것이 아니지만, 오히려 그렇게 본질을 묻지 않음으로써 본질을 떠올리게 하는 아이러니한 조형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더 나아가 생각해 보자. 사물의 현실과 그림자로서의 허상은 사뭇 다른 것이기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결국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환권은 드물게 형태적으로만 볼 때 극사실주의 조각과도 같은 작업을 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작업이 이를 여실히 반증한다.) 


그림자 미학

그림자는 부재의 조형적 힘을 드러낸다. 이환권은 조각에서 오랫동안 소홀히 취급되었던 그림자 미학을 주목할 만한 조형성으로 모색하고 있다. 이환권의 그림자는 실상 그림자가 아니다. 이 세상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그림자는 선이나 색을 갖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입체적이지도 않다. 이에 반해 작가의 그림자는 선에 따른 면과 색 그리고 비록 전통적인 매스와 구조는 아니지만, 어쨌든 매스와 구조를 갖고 있고 공간과 관계하고도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그림자는 허상으로서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고 있다. 이는 곧 사실이나 현실 나아가 본질이 언급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는 아니라는 것’을 조형적으로 말해준다. 이환권의 작업은 추상미술이나 개념미술의 범주에서 파악될 수 없다. 추상과 개념은 본질에 너무 가까이 가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이환권은 오히려 반대다, 그는 본질에서 멀어짐으로써 본질을 묻고 있다. 본질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림자가 본질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이환권은 작업은 인식론적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이다. 그림자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림자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환권의 작품을 보다보면, 본질로 인해 버려지고 상실된 것이 너무 많다는 것도 떠올리게 된다. 본질이라는 알맹이를 얻고자 하는 과정에서 너무도 부당한 방식으로 껍질이 희생되었다. 실상 본질과 껍질은 어떤 의미에서 동일한 허상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이환권의 그림자는 완전성의 미학에 저항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완전성이야 말로 허상이 아닌가? 그림자 미학은 또한 시각문화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이환권은 착시나 착각을 주는 기법을 통해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하는 작업에 주안점을 두고 있지는 않다. 그에게 시각은 그림자로서의 허상에서 기억과 감각의 이중주로 드러나는 아름다운 예술적 표상, 달리 말해 부재, 흔적 그리고 허상으로서의 그림자 미학의 디테일을 보여주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그림자가 흐른다. 내려가기도 하고 올라가기도 한다. 이환권의 그림자는 중력의 무게에서 해방된 그림자이다. 자유롭게 부유하는 그림자는 일상의 모든 곳을 떠돌아다닌다. 일상이 그림자이고, 그림자가 일상이 된다. 이환권의 그림자 미학은 그리하여 일상미학이기도 하고 환경미학이 되기도 한다. 하여, 그림자로서의 부재, 흔적 그리고 허상이 아름다움으로 변용되는 그곳에서 특별한 미적 경험을 조우하게 된다.  

 

 

Absence, Trace and Illusion – Yi Hwan Kwon’s Aesthetics of Shadow

Seong Hoon Lim (Aesthetics, Art criticism)

 

Prologue

 

James Joyce famously praised “Absence, the highest form of presence” in his short story “The Dead”. While it is inapplicable that I go into depths of what he meant with this pithy statement, I would still argue that this quote elucidates the direction and purposiveness of Yi Hwan Kwon’s shadow works. Though existence enlightens us with absence, this association is not strong enough. Absence, on the other hand, calls to mind the image of existence stronger than anything. Through such an association artistic imagination elevates and thrives. Yi Hwan Kwon’s shadow works show formativeness of ‘existence made to life by absence’. Shadow is coincidentia oppositorum of existence and non-existence. In such a sense shadow is a trace. “To feel the trace” is a phrase that we are all familiar with (translator’s note: more prominently so in Korean language) that relates to us that there was an existence but it is absent. Trace conjures an infinite aura of sensibility that words alone cannot grasp. However, trace eventually goes back to illusion. Absence, as a shadow, conjures existence; and the existence leaves a shadow behind as a trace but eventually is an illusion. Yi Hwan Kwon’s works intend to show existence as a formative trace by absence, illuminating the sublimity of illusion with an aesthetics of shadow.

 

Shadow, what traces.

 

There is no dichotomy to trace. Trace doesn’t have a boundary to begin with, as though water color permeates and flows on a canvas. Yi Hwan Kwon’s works merely shows the trace, rendering the effort to distinguish between the real and the unreal without fruition. Trace is neither real or unreal, much like a scratch on the surface that has no meaning attached. Even when sculpting survives on as a trace, it is merely a formative trace. Formative trace is always unreal to the real, but it is never entirely unreal. Trace as a shadow surfaces and disappears, disappears and then reemerges. This peculiar state of reality and unreality cannot be grasped with the usual formative terms and theories. Hence the formativeness of trace can be said to be a veneer, an exterior.

  Trace is represented as an exterior not an interior. You have to thresh the rice to remove the straw; but Yi Hwan Kwon as an artist does not seem interested in rice. He seems more intrigued by the straw, the hull and bran that floats around the milling plant as if to defy gravity. But without hull and bran rice cannot exist. One can even call the exterior the cause of rice. What is the cause of the exterior then? We do not know. An exterior is an exterior – it cannot be comprehended within the boundaries of causality. Yi Hwan Kwon’s shadow works blurs the understanding of real and fake and obfuscates the boundaries. We who merely try to catch the disappearing, the people who are constantly stifled and pinned down by gravity, now experience profoundly powerful formativeness. Only through works that exist merely as hull and bran can we truly see the world apart from all the vicissitudes of life. Indeed, one should not read this as a cliché ‘everything is an illusion’ sort of epistemological fallacy. Such a fallacy is a misunderstanding of Yi Hwan Kwon’s shadow.

 

 

 

Plato’s Shadow, Yi Hwan Kwon’s Shadow

No one is certain when this began, but shadow has a negative connotation. A good example would be (translator’s note: Korean language specific) “your face is shadowed”, a phrase that delineates one’s sad, troubled face. It is true that shadow has been perceived as a symbol of negativity for a long time. Another good example of this would be Plato. As widely known, Plato criticizes the shadow in his allegory of the cave. Shadow is the symbol of the darkness placed furthest from the Idea of truth. Image of the shadow seduce people – the illusion replaces the truth and starts deceiving people. People who merely look at the shadow are facile, since the real exists outside the cave and not the inside. The inside of the cave is an unreliable world of senses. Hence Plato’s nudge to follow the logos and leave the cave.

  What’s scintillating is Plato’s view that real material objects are mere copies as well. Perhaps it’s less fake, but it is still hoax reality. To Plato both the material object found in reality and the shadow of it are both fake. In this very sense, as ironical as it may sound, Yi Hwan Kwon’s works become Platonian. Showing the form of the object in shadows and letting the audience acknowledge that it is merely an illusion is the philosophy that penetrates his works. However, on another note, Yi Hwan Kwon’s works is not Platonian. To Plato, all objects, objects of reality of shadow alike, are mere mimesis of eidos (translator’s note: ancient Greek for form), the original that can be said to be the cause of all objects. Yi Hwan Kwon’s works, however, have no conceptualization of “cause”. The cause of the shadow is not the object of reality nor eidos, the original of Idea. Shadow itself is a representation of illusion of the absence that only expresses itself as a trace of what exists. Illusion does not pin down itself as a meaning, but stimulates various imaginations in the tension between meaning and non-meaning. The name of the illusion is not meaning but trace, and it reminds us of existence through absence. Yi Hwan Kwon’s works swoop in precisely here, the gray area between absence and existence and expressing the senses of formativeness of the tension between it.

 

Illusion as a Shadow and the essence of sculpture

 

Yi Hwan Kwon’s shadow exists while absent as an effect without a cause. Here the meaning disappears in the exterior-like form. Illusion can stay as an illusion since meaning surfaces occasionally. However, such a meaning oscillates between existence and disappearance. Shadow is always the shadow of ‘something’. But to think of it, the ‘something’ is unidentifiable. We can only understand ‘something’ on a conceptual level in our experience, but we cannot get to the essence of ‘something’. Kant called such a ‘something’ “thing in itself” (Ding an sich). Yi Hwan Kwon’s shadow shows notable visibility on one hand in that sense, and an interesting formative metaphysics on the other, since shadow as an illusion is a powerful formative trace that proves that the object is not the object that it appears to be. A fake like real, or a real like fake alike, they all come to a natural corollary of ‘illusion’. Illusion left as a trace, that is the nature of Yi Hwan Kwon’s shadow works. This is precisely why we should not overlook the philosophy of the works and merely indulge in the technical ingenuity or visual pleasure.

  Illusion emerges as a form of distortion and accentuation. Better yet, everything that appears to us, even the PLA (Poly Lactic Acid) that the author uses, is a mere illusion. If everything is an illusion, isn’t illusion something that’s pivotal in human epistemology? Even so the illusion as a shadow is inessential to the essence, and is considered marginal to the core. Many sculptors who left their names in the history of art have pursued proportion, balance and harmony in describing human body since they focused on the essence of the body. Polykleitos, an ancient Greek sculptor and his Canon, or homo bene figuratus by sculptors from the Renaissance are prime examples. Modern sculpture post-Rodin is, while to certain extent different from its predecessors, still focusing on the essence as the centrifugal force that pins down the nature of works. Doesn’t formative essence lie in the core of modern abstract sculpture? Yi Hwan Kwon marks an attempt to shift the paradigm of formative obsession over essence. Such an attempt is made possible through shadow, the inessential and the marginal. When sculpture is discussed it is mostly about space, mass and structure which circulate around the essence. There is little to none discussion of shadow, if they ever do, it’s done in a secondary and derivative way related to light. Thinking ironically, perhaps shadow is the true essence. A person without a shadow is not a person but a ghost. Yi Hwan Kwon, of course, does not focus on asking the essence of sculpture – but precisely by not asking that question he is successful in conjuring the meaning of essence in the audiences’ mind. Let’s take this even further: the reality of the object and the illusion as a shadow are two different things, but they are eventually the same (Yi Hwan Kwon sometimes indulges in a formatively hyperrealistic sculpture and that proves my point).

 

 

Aesthetics of Shadow

 

Shadow surfaces the formative power of absence. Yi Hwan Kwon is pursuing a notable formativeness of shadow aesthetics that have been neglected in the world of sculpture for a long time. Yi Hwan Kwon’s shadow is not a shadow. No shadow in the natural world has lines or colors or is dimensional. On the other hand, Yi Hwan Kwon’s shadow has space and color, and while it is not conventional mass and structure, has some mass and structure and is related to space. Even then this shadow leaves the palpable trace as an illusion. This is a way of making a formative statement that not everything in the world is “as it appears to us”, such as ‘facts’ or ‘reality’, and to take it further anything that is said to have essence. Yi Hwan Kwon’s works cannot be understood in the boundary of abstract art or conceptual art. Abstract and concept have a penchant to move closer to the essence. Yi Hwan Kwon’s the exact opposite. He is questioning the essence by detaching himself and his works from it. Shadow, what is thought to be the farthest from essence is used to discuss essence. In this sense, Yi Hwan Kwon’s works are rather ontological than epistemological. It is not how we perceive the shadow that it matters in his work, but how shadow exists.

Looking at Yi Hwan Kwon’s works, I am reminded of things that are disposed and lost due to essence. We have sacrificed the hull and bran in hopes of obtaining the essence, when hull and bran could might as well be the same level of illusion as the essence. Yi Hwan Kwon’s shadow works resist the aesthetics of completeness. If you think about it, isn’t completeness itself an illusion? Aesthetics of shadow is a critique of visual culture as well. The artist does not thrive on visual stimulus such as an optical illusions or artistic techniques that confuse the beholder. This is because, vision, to him, is an indicator of the beautiful artistic representation that is revealed as a duet of memory and sense in an illusion as a shadow, in other words, the details of the shadow aesthetics of absence, trace, and independence of the virtual image.

 

Epilogue

 

Shadow flows. It goes both up and down. Yi Hwan Kwon’s shadow is emancipated from the stifling weight of gravity. Shadow flows around every corners of life, floating freely. Life is a shadow, and shadow becomes life. Yi Hwan Kwon’s aesthetics of shadow is therefore an aesthetics of life and an aesthetics of environment. This is why we face a special aesthetic experience through his works in the artistic space where absence as a shadow, trace, and illusion turn sublimity.

 

Artist: Yi Hwankwon

Date : July. 1st (Thu), 2021 -  July. 31st (Sat), 2021

Opening Reception:  July. 1st(Thu) 15:00~ 20:00 

Venue : GALLERY YEH l 73 Garosu-gil, Gangnam-gu, Seoul, Korea

​작가: 이환권

​전시기간 : 2021. 7. 1(목) ~ 2021. 7. 31 (토) 

​오프닝 행사 : 2021. 7. 1(목) 오후 3시 ~ 오후 8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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