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의 별이 되어 (45주년 기념전)
2023.04.05-05.04
Information
<전시소개>
‘밤하늘의 별이 되어’
안녕하세요. 예화랑 김방은입니다.
2023년 4월 예화랑 45주년 기념 전시 ‘밤하늘의 별이 되어’는 저희 화랑으로서는 특별한 계기가 담겨있어 소개할까 합니다.
이번 전시는 2021년 여름 제가 받은 한 통의 전화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충남문화재단이라는 곳에서 한 장의 흑백 포스터 이미지를 보내주면서 작품 제목은 ‘제주 목장’, 작가는 이완석이라는 분인데 작가의 작품이 맞는지 확인해 달라는 거였습니다.
‘이완석’은 다름 아닌 저의 외할아버지 이름이었습니다. 전화를 주신 분은 재단에서 충남미술사 조사연구를 담당하는 연구원이라고 하셨는데 충남에서 태어난 예술가들을 정리 중이라고 하시면서 작품 확인을 부탁한 거였습니다. 이완석 할아버지 고향이 충남 공주였거든요.
외 할아버지를 잘 몰랐던 외손녀
할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기 2년 전에 돌아가셔서 저는 직접 뵌 적이 없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일 수도 있지만 저는 평소 외할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1915년에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가 디자인 공부를 하고 돌아와 종로4가 청계천 쪽에 있었던 천일백화점 안에서 화랑을 하셨다는 것과 산업미술, 디자인 관련 일을 하셨다는 정도만 돌아가신 어머니나 외가 친척들로부터 듣고 있었습니다.
저는 예화랑을 만들고 키우신 어머니 이숙영 대표님이 13년 전에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일을 물려받아 동분서주하던 상황이어서 사실 할아버지의 삶에 관심을 가질만한 특별한 계기나 경황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전화를 받고 마음속에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매우 중요한 일 같아 보였고 꼭 제대로 확인해서 알려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장 외갓집 장손인 큰외삼촌에게 달려갔습니다. 큰외삼촌은 제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안방에서 뭔가를 한참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먼지가 수북이 쌓인 그림들과 자료들을 통째로 들고 나오셨습니다. 그중에 바로 ‘제주 목장’ 원본이 있었습니다.
칼라로 그려진 원본과 그 옛날 할아버지가 찍은 흑백 사진 뭉치들, 신문 자료들을 포함한 오래된 기록들을 보면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제주 목장’을 그린 사람이 외할아버지라는 게 맞다는 걸 확인했다는 생각을 넘어서 ‘이완석’(1915~1969)이라는 존재가 우리 현대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예감이 든 거죠.
우선 그림들이 너무 좋았습니다. 저는 외할아버지가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인 줄 몰랐습니다. 모친으로부터 ‘아버지가 드로잉 정도는 하셨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은 얼핏 있었지만 지금 봐도 손색없는 현대적 감각이 살아있는 포스터들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제게 날아온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저는 큰외삼촌으로부터 ‘이완석’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와세다대 갈 뻔하다 태평양미술학교로
우선 작가가 된 계기가 흥미로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제 강점기라는 상황에서 좀 엉뚱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완석은 원래 와세다 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고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등록을 앞두고 와세다대와 게이오대 농구 전에 우연히 선수로 뛰게 되었다고 합니다.
서울에서 이미 농구를 잘하기로 이름이 나 있던터라 이를 안 와세다대 선배들이 선수로 뛰라고 권유했던 모양입니다. 급기야 와세다대와 게이오대 간에 농구전이 벌어졌는데 마지막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넣는 바람에 와세다대를 승리로 이끌기까지 했다는 겁니다. 아시다피시 와세다와 게이오는 우리나라 연고전, 고연전처럼 대학 간 경쟁이 치열했다고 하잖아요.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게이오 대학 측에서 아직 입학 등록도 하지 않은 선수를 뛰게 한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고 외할아버지는 결국 입학이 한해 미뤄져 졸지에 1년을 쉬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겁니다.
이런 사실을 조선에 계신 부모님께는 죄송한 마음에 알릴 수도 없고 일본에서 생활비도 스스로 마련해야했던 형편이다보니 아르바이트로 일본 잡지사에 들어가 삽화를 그려주게 되었는데 이게 이완석의 운명을 바꾸게 됩니다. 자신에게 그림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며 갑자기 진로를 바꿔서 태평양미술학교를 가게 된 거죠.
태평양미술학교는 1929년 도쿄에 만들어진 사립 미술학교인데 1930년대부터 구본웅, 이인성, 남관, 박득순, 최재덕, 손응성 등 훗날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이 된 한국인 유학생들이 서양화를 배우기 위해 공부했던 곳입니다.
이완석 선생이 공부한 시기는 1932년에서 1936년까지입니다. 도안,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고 1937년에 서울로 돌아온 그는 천일제약 디자이너로 취직하게 됩니다.
천일제약은 조고약(趙膏藥)으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지금 세대에게 ‘고약’은 생소하겠지만 위생 환경이 좋지 못했던 당시에는 몸에 자주 생기던 질병인 종기(부스럼)를 치료하는 외상 치료제였습니다. 1905년에 발매된 ‘이명래 고약’이 1호인데 ‘조고약’은 이보다는 뒤에 나왔지만 이명래고약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고 합니다. 본점은 지금 광장시장 바로 옆에 있었다고 하는군요. 처음 이름은 천일약방이었다고 합니다.
천일제약 디자이너가 되다
1913년 창립된 이 회사의 창립자는 한의사였던 조근창 선생님입니다. 천일약방은 1918년 코로나19처럼 창궐한 스페인 독감 때문에 사세가 커졌는데 조근창의 아들 조인섭 대에 와서 조고약이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주식회사 천일제약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완석은 일본에 있을 때 천일제약 아들과 인연을 맺었고 이 인연으로 귀국 후 천일제약 도안과에 취직을 하게 되는 거죠.
이완석은 약 봉지부터 고약을 비롯한 다양한 제품에 관한 디자인을 하게 됩니다. 일제 강점기였는데도 무궁화 문양을 상표에 넣었는데 이것을 만든 천일 약방이 민족기업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어 디자이너를 넘어 천일백화점 경영을 위임받는 ‘지배인’역할까지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1954년에 백화점 안에 ‘천일 화랑’을 열었고 예술가들과 교유하고 그들을 지원해주는 일을 하게 된 거죠.
저는 큰외삼촌으로부터 이런 사실들을 전해 듣고 옛날 기록들을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이구열 선생님이 미술춘추(한국화랑협회 발간)에 연재한 ‘한국 근대 화랑사(史)’에서 외삼촌 말씀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충남 공주 태생으로 동경의 태평양미술학교 도안과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했던 이완석은 8.15 해방 전에 서울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제약회사의 하나였으며, 지금도 존속하는 ‘조고약’ 본포의 도안 담당으로 일자리를 얻고 있었다. 동경 유학 때에 ‘조고약’사장의 아들과 긴밀한 친구가 된 관계로 그렇게 된 후 이완석은 사장으로부터 관리능력도 인정을 받았다. 6.25 직후 종로 4가의 조고약 본포 건물이 천일백화점이란 자매 경영체로 새 출발할 때에 그는 백화점 전체를 관리하는 지배인이 되었던 것이다.
천일화랑의 당시 위상은 어땠을까요.
저는 이구열 선생님에 이어 이완석의 흔적을 찾아 들어가다가 1957년 신태양이라는 잡지(4월호)에 당대 유명한 작가이자 화가였으며 도예, 판화, 문필가로 활동이 왕성했던 정규 선생님이 쓴 글을 발견하고 정말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정규 선생님은 어느 날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가 안내장 하나를 발견하는 데 1954년 7월에 '천일백화점 미술상설진열관‘ 이라는 곳에서 ’한국현대미술작가전’을 여니 작품을 출품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상설진열관이 바로 오늘날로 말하면 화랑이었던 거죠.
여기에 언급된 천일 화랑에 관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참고로 읽기 편하게 현대어로 약간 고쳐서 인용합니다.)
'개관일은 7월 25일로 되어 있는데, 나는 그때 어떤 그림을 출품했었는지 기억치 못하고 있으나, 안내장에 다음과 같이 써있었다. ‘회화예술의 대중 침투로써, 언제나 볼 수 있는 대중 감상의 자유로운 시간의 확보와 설비, 설치가 불가결의 조건으로 사료되며, 이로써 민족미술의 발전과 해외 진출의 시도는 실천될 것으로 믿는 바입니다’
이는 억지로 웃어넘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천일화랑은 환도직후의 화단에 새로운 힘을 배양하는 모체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었다.
천일화랑은 당시의 화단적인 악조건을 극복하려고 애를 써 왔다. 천일백화점 지배인 겸 상업미술계의 중진인 이완석 씨의 협력은 대단한 바 있지만, 그 천일화랑, 다시 말하면 천일백화점 미술상설진렬관은 그 후 반년을 계속치 못하고 말았다. 종로 4가는 장사를 하는 곳이지 전람회를 할 지역은 못되는 곳이라면 실언이 될까?
천일백화점 미술상설진렬관이 아무런 성과도 없이 하나의 비상설미술진렬관이 되고 말았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기억하건대, 사변 중 작고한 김중현, 이인성, 구본웅 3씨의 유작전을 개최한 것이, 그 당시 설비는 불충분하였었지만, 다시 찾은 서울에서 전화 중에 객사한 3씨의 유작전을 솔선하여 개최하였다는 것은 3씨의 친지들의 우정 탓이라고는 하나, 천일백화점으로서는 뜻하지 않은 영광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정규 선생님의 평가에 대해 이구열 선생님은 앞서 소개한 글에서 천일화랑의 역할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평하고 있습니다. 외할아버지 이완석이 꿈꿨던 화랑의 미래가 구체적으로 기록된 소중한 자료라고 생각되어 이 선생님의 글을 길게 인용해봅니다.
'정규의 이 천일화랑 언급은 그것이 6.25 전란 직후 서울에서의 첫 영업화랑의 등장이었다는 사회적 의미와 천일백화점 측의 미술가 지배인이던 이완석의 비영리적인 의욕을 알려 주는 긴요한 증언이다.
이완석(1915-69)과 천일백화점 미술상설진렬관의 일환으로 꾸며졌던 천일화랑의 내막은 더 좀 확실하게 인식돼야 마땅하다. 그때는 종로4가로 불렸지만 지금의 청계로에 접했던 천일백화점(1977년에 없어진 후 서울신탁은행 동대문지점 신축 빌딩이 들어섰다)에 많이 연구한 운영방침의 화랑이 생긴 것은 앞에서 인용한 정규의 글에도 밝혀지듯이 1954년 7월 하순의 일이었다.
6.25동란으로 증발해버린 충무로 대원화랑의 뒤를 이은 이 개척적인 새 화랑의 출현 경위를 상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으나, 당시 백화점 지배인이던 이완석의 미술계와 사회를 위한 적극적 발상이자 추진이었던 것은 명백하다.
자신이 산업미술가로서 미술계와 직접 관련을 갖고 있었던 이완석은, 6.25동란으로 참혹한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던 가까운 친구를 포함한 여러 미술가들에게 다소라도 도움을 베풀고자 자신의 백화점 지배인 위치를 활용한 것이었다.
그는 기존의 화신, 동화(지금의 신세계), 미도파 백화점 화랑이 취했던 단순한 대여 운영과는 다른 본격적 영업화랑이자 종합적인 미술 센터를 의도하고 있었다. 개관 기념전으로 ‘현대미술작가전’이 개최될 때에 백화점 측은 신문에 대대적인 광고를 내면서 화랑의 운영방침도 제시했는데, 다음과 같은 방향이었다.
1. 고전미술, 현대미술의 진렬(매월 진렬 교체)
2. 작품 즉매, 대서, 고미술 감정
3. 한국미술의 해외 소개
4. 미술강좌 (사계 권위자 초빙)
5. 표구, 액연, 미술재료 일절
*매 일요일마다 제 화백을 초빙하여 선자화 특별 휘호
대단한 의욕이었다. 그런 생각과 의욕을 행동으로 추진할 수 있은 것은 역시 이완석 지배인이 미술가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백화점 고객들에게 가난한 미술가 친구들의 작품을 적극 팔아주자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고객들에게 미술교양의 기회와 환경 조성이 긴요함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덕에 많은 화가가 실제로 여러 형태의 도움을 받았다. 다음에 열거하는 개관기념전 출품자들이 천일화랑과 처음부터 밀접히 연관을 가진 작가들이었다.
동양화 – 고희동, 김은호, 이상범, 이응로, 배렴, 장우성, 김영기, 이유태, 장덕, 정진철, 박생광, 이현옥, 김화경
서양화 – 도상봉, 이마동, 김인승, 김환기, 남관, 이봉상, 박영선, 박득순, 박고석, 윤중식, 이중섭, 장욱진, 한묵, 수경, 한홍택, 이세득, 권옥연, 이종무, 정규, 조병현, 박수근, 황유엽, 김두환, 최영림, 손응성
조각 – 윤효중, 김경승
고난 속에서 꽃핀 3인 유작전
이구열 선생님은 천일화랑이 비록 6개월 만에 문을 닫지만 매우 특별한 전시가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바로 ‘김중현, 구본웅, 이인성 3인 유작전(1954년 9월)’입니다.
이 선생님은 이 3인 유작전이 근대 한국화랑사에서 존재를 뚜렷하게 해준 전시였다면서 그 운영방침의 다각적 설정과 시도는 대단히 획기적인 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인 유작전의 김중현, 구본웅, 이인성은 6.25 전쟁중에 서울에서 52세, 47세, 38세로 각각 타계했다. 고난 속의 악성 발병과 비극적 사건으로 인한 죽음들이었다. 그들은 동란 전해인 1949년 에 1회전을 가진 국전의 추천 작가들이자 심사위원도 역임한(김,이) 쟁쟁한 화가들이었다. 그들의 죽음은 미술계의 커다란 충격이자 슬픔이었다.
휴전이 되고 사회가 안정과 질서를 회복하기 시작하던 1954년에 대한미협(당시 회장 고희동)이 전체 미술인의 이름으로 그 슬픔을 표시한 것이 3인 유작전이었다. 그리고 그 장소로 택한 것이 천일화랑이었다.
유족들의 협조로 추진된 3인 유작전은 미술계의 여러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추도식 절차도 병행되었다. 그때 비용은 천일화랑 측, 곧 이완석 지배인이 일절 부담했다. 그 자신도 유작전 작가들과 생전에 가까이 접촉하고 존경하던 관계였다.
현대 미술사를 방대한 분량으로 정리한 최열 선생님도 역작 ‘한국현대미술사-한국미술사 사전 1945~1961)에서 ‘3인 유작전’을 별도 키워드로 빼내 이런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9월12일부터 20일까지 천일화랑에서 김중현, 구본웅. 이인성의 유작전이 열렸다. 이 유작전은 대한미술협회와 서울신문사가 공동주최한 것이었다. 이경성은 삼인전에 대해 세 작가의 흩어진 작품을 회고할 수 있는 최초의 시도로 화단적 의미가 큰 전시라고 평가했다.
“일찍이 일제 강점기 이래 양화(洋畫)단의 개척과 발전을 위하여 헌신하고 일생을 통하여 제작생활에 고민하여 온 대선배로서....”
유작전에는 세 작가의 유작 사십여점을 수집 진열했는데 전시개막 일주일전에 국방부 보도과로부터 10호크기의 김중현 유작 ‘자화상’을 반입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개막일에는 세 작가의 추도식이 열렸다.
추도식은 미협 부회장 이종우의 개식사, 도상봉의 작가들에 대한 경력보고, 묵념, 고희동의 추도사를 비롯 ‘서울신문’ 편집국장, 문총 최고위원, 이화여중고 교장의 추도사에 이어 추모가와 유가족 대표 구본준의 답사 순서로 이어졌다.
개막일에는 소슬한 비가 내렸다. 김병기는 연말 화단평에서 유작전에 대하여 쓰기를 전란 중 쓸쓸하게 작고한 이들의 유작전이 개최되었다는 것은 의의깊은 일이라면서 후배들에게 많은 감회를 주었다고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기까지
저는 큰외삼촌으로부터 작품을 포함한 다양한 유품들을 세 차례에 걸쳐 싸 들고 와서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엄두가 나지 않아 뭐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분류를 시작했는데 차츰 유족으로서의 사명감을 넘어 한국현대미술사의 뿌리를 찾아가는 재미가 생겼습니다.
특히 할아버지가 남긴 흑백 사진들을 들여다보며 사진 속 사람들이 누굴까 궁금증도 일었습니다.
“사진 속 인물들 중 아는 분이 있느냐”고 외삼촌에게 물었더니 삼촌이 한분을 짚으셨습니다. 한홍택 선생이었는데 아드님이 한운성 서울대 서양화 교수셨지요.
저는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친구를 통해 한 교수님의 연락처를 받아 전화를 했더니 교수님이 외할아버지를 잘 알고 계시다고 해서. 너무 반가웠습니다. 어릴 때 만리포해수욕장도 같이 가셨다는 겁니다.
교수님께서는 제게 “아버지 한홍택 선생 작품들을 모두 정리해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을 했다”면서 “이완석 유품들도 연락하면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교수님 말씀은 제게 또 다른 동기부여가 되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이완석을 제대로 알리고 작품과 자료들도 제대로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든 거죠.
그렇게 저는 한분 한분 할아버지 유품들에 남아있는 흔적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한교수님에 이어 외할아버지가 해방 직후 만들었던 ‘조선 산업미술가 협회’ 분들 중에 당시 막내 격이었던 백금남 선생님과도 연락이 닿았습니다. 백선생님은 외할아버지를 생전에 많이 뵙지는 못했지만 잘 알고 계셨습니다. 자료를 보여드리니 “어떻게 이렇게 잘 모아놓았느냐”고 놀라기도 하셨습니다.
큰외삼촌이 보관해놓은 작품들 중에는 뒷면에 ‘문우식’이란 서명이 있는 작품이 있었는데 백선생으로부터 이 분이 당신의 스승이며 그의 따님이 유품들을 잘 정리해 홍익대에서 전시도 한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바로 따님(문소연)과 연락을 했고 마침 도예를 전공한 예고 선배라는 인연과 같은 유족 입장이라는 연대감을 확인하며 자료 정리에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것을 연대별로 정리해본 경험이 있는 문소연 선생님도 우리가 갖고 있는 자료들이 귀중한 것들이 매우 많다며 특히 흑백사진들이 매우 귀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당시만도 카메라가 귀했던 시절인데 외할아버지가 카메라가 있어서 사진들을 남길 수 있었던 것 같았다면서 말이죠.
어느 정도 자료정리가 되었다고 판단되어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았고 결국 2022년 4월 자료 기증에까지 이르렀습니다. 2022년 11월에는 이완석을 포함해 국내 산업디자인의 뿌리를 찾는 기획전 ‘모던 데자인: 생활, 산업, 외교하는 미술로’전이 열렸습니다. 유족으로서 또 미술계의 한사람으로 너무 감사하고 뿌듯한 일입니다.
다시 생각해보는 ‘이완석 시대, 그리고 친구들’
외할아버지는 정말 생전에 열심히 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화랑도 하고 민예품연구소도 하고 동남아 순방도 가고 마지막에는 일본을 오가면서 디자인포장센터 만드는 일로 동분서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다 54세 나이에 고혈압으로 갑자기 쓰러져 돌아가셨어요. 이구열 선생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천일백화점 4층에 설정했던 자신의 각별한 집착의 화랑이 뜻대로 되지 않자, 이완석은 1969년에 불의의 고혈압으로 54세의 생애를 마치기 전까지는 그 화랑자리에 한국민예품연구소를 만들어 새로운 집념을 나타냈었다. 토속적인 각종 민예품과 그 복제품의 수집, 제작, 판매 센터였다. 그것도 대단히 깊은 인식의 발상이었으나 역시 여러 원인으로 기대했던 만큼의 발전을 보이지 못하다가 중단되고 말았다.
나도 거기에 여러 번 찾아가 이완석 사장의 민예품 사랑과 그 보급에 대한 열의 및 계획을 직접 설명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곳은 또 언제나 많은 미술가들의 집합소였다. 한홍택, 조능식, 정규, 김관현 등과 미술평론가 이경성, 석도륜 등이 특히 자주 들르곤 했었다. 이완석 사장의 인품이 아주 온후하고 모가 없으며,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대해 주어 많은 미술가들이 그를 좋아했었다.
이완석은 한국 산업 디자인의 그야말로 1세대 프론티어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산업미술가 협회, 대한미술협회, 조선공예가협회를 만들며 작가들과 연합해 다양한 협회를 만든 활동가이기도 했습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쑥대밭이 된 시대에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일원이었던 거지요. 일례로 최열 선생의 책 한국미술사 사전에 등장한 조선산업미술가 협회에 대한 설명은 이렇습니다.
조선산업미술가 협회가 1945년 12월27일 결성되었으며 회관은 서울 예지정 189번지 천일빌딩에 자리를 잡았고 임원은 권영휴, 한홍택, 홍순문, 이완석, 유윤상, 조능식, 엄도만, 조병덕, 최정한, 이봉선, 홍남극이었다.
외할아버지 이완석이 운영했던 천일화랑은 전후 처음 생겼던 상업 화랑이자 바로 예화랑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개인적인, 가족적인 인연을 넘어 한국현대미술사의 초기를 함께 했던 작가들의 작가 정신을 오늘날에 되살려보겠다는 마음에서 출발했습니다.
예화랑과 인연을 맺었던 콜렉터들의 개인 소장품들을 중심으로 50여점이 선보이며 오지호, 구본웅, 남관, 임군홍, 이인성, 김환기, 윤중식, 김향안, 손응성, 유영국, 최영림, 장욱진, 이준, 이대원, 임직순, 홍종명, 정규, 문신, 권옥연, 천경자, 변종하 21명의 대가들의 작품이 선보입니다. 이 분들 모두 생전에 이완석, 예화랑과 인연을 맺었던 작가들입니다.
올해는 예화랑 창립 45년이 되는 해이며 저희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제가 저희 이모 이승희님과 함께 대표를 맡은 지 13년이 되는 해입니다. 개인적으로 저의 뿌리와 제 업의 뿌리를 찾았던 지난 시간은 정말 감사하고 소중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당시를 살았던 분들의 예술에 대한 진정성, 순수함과 열정을 느끼며 새삼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고 작가에 대한 존경심, 예술에 대한 경외감을 다시한번 새길 수 있었습니다.
힘들었지만 아름다웠던 시기를 돌아보며 지금처럼 좋아진 세상을 보지 못하고 가신 분들의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비록 지금 모습은 볼 수 없지만 ‘밤하늘의 별이 되어’ 우리와 함께 계신 분들을 말이지요.
Artist: Oh Ji-ho, Gu Bon-ung, Nam Kwan, Lim Gun-hong, Lee Ins-ung, Kim Whan-ki, Yoon Jung-sik, Kim Hyang-an, Son Eung-sung, Yoo Young-kuk, Choi Young-rim, Chang Uc-chin, Lee Joon, Lee Dai-won, Yim Jik-soon, Hong Chong-myung, Chung Kyu, Moon Shin, Kwon Ok-yon, Chun Kyung-ja, Byun chong-ha
Date : Apr. 5th (Wed.), 2023 - May. 4th (Thu.), 2023
Opening Reception: Apr. 5th(Wed.) 15:00~ 20:00
Venue : GALLERY YEH l 73 Garosu-gil, Gangnam-gu, Seoul, Korea
작가: 오지호, 구본웅, 남관, 임군홍, 이인성, 김환기, 윤중식, 김향안, 손응성, 유영국, 최영림, 장욱진, 이준, 이대원, 임직순, 홍종명, 정규, 문신, 권옥연, 천경자, 변종하
전시기간 : 2023.04.05(수) ~ 2023. 05.04 (목)
오프닝 행사 : 2023.04.05(수) 오후 3시 ~ 오후 8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