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 훈 개인전 - HOMAGE to HOMO SAPIENS
2023.03.02-03.31
Information
<전시소개>
찻잔과 고래, 무용(無用)과 비지(非知)의 세계
황 인(미술 평론가)
곽훈이 이번 예화랑 전시회에서 내놓는 작품들의 주제는 찻잔과 고래다. 한국에서 활동하던 곽훈은 미국으로 이주하여 찻잔 그림으로 미국 화단에 데뷔하였다. 이때 등장한 찻잔 그림은 지금까지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번에 전시되는 찻잔 연작은 10년만에 그린 것들이다.
고래는 최근에 나온 주제다. 2012년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특별전 ‘곽훈 : 시, 다, 선’에서 찻잔 드로잉 연작과 고래뼈 오브제로 이루어진 ‘관조’라는 제목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이때 실제의 찻잔 100개로 이루어진 설치작업도 전시되었다. 이번 전시회에는 찻잔의 드로잉 연작과 고대인의 고래사냥을 그린 할라잇(Halaayt)이란 제목의 페인팅이 전시된다. 할라잇은 이누이트 말로 ‘신의 강령’을 뜻한다.
작은 찻잔과 큰 고래, 이 둘이 각각 놓인 도메인의 상황은 서로 극단적으로 달라 보인다. 곽훈은 한국과 미국을 오갈 때 동경에서 환승을 하곤 했다. 한번은 우에노공원에 있는 동경국립박물관을 들렀는데, 이때 전시중이던 조선의 찻잔을 보고는 큰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그림의 주제가 되었다.
찻잔이 놓인 도메인은 안정된 농경문화권이다. 실용이 충족된 농경사회에서 찻잔은 실용을 초월한 극한의 심미적 의식(리추얼)을 인도한다. 찻잔은 우리가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기물 중에서도 작은 축에 드는 오브제다. 그 작은 찻잔이 담아내는 것은 유용(有用)과 실용을 넘어선 무한한 무용(無用)의 세계이다. 그 무용의 세계는 우주의 생명으로 열린다. “작은 하나의 찻잔이 세상에서 가장 큰 무게와 기능과 공간을 가질 수 있는 어떤 미학을 가지고 있다고 보지요”(곽훈, 임두빈의 대담 중에서 곽훈의 말, 2012 대구미술관 특별전 곽훈 : 시, 다, 선 도록) 곽훈은 찻잔을 지속적으로 그려왔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작업실에 가마를 만들어 직접 찻잔을 구워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찻잔은 현실의 찻잔이 아닌 무용을 담아내는 상징으로서의 찻잔이다.
곽훈이 그리는 찻잔은 그가 동경국립박물관에서 보고 감동한 찻잔, 말차를 담아 마시기에 최적의 형태를 가진 조선의 찻잔 이도다완(井戶茶碗)을 연상케 하기는 하나 찻잔 그림이 그러한 구체적인 형태에 얽매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그리는 것은 찻잔의 형태가 아니라 찻잔이 인도하는 무용과 무한한 생명의 우주라는 상징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무용의 세계는 엄격하고 까다로운 의식(리추얼)을 통해 열린다. 차를 마시는 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찻잔과 다실의 분위기이며 몸속으로 들어가는 차라는 구체적인 물질과 성분의 역할은 매우 미미한 것이라는 게 곽훈의 지론이다. 사방이 막힌 좁은 다실, 자그마한 찻잔 오브제는 외부를 향한 감각을 차단시키고 내부를 향한 감각을 집중시킨다. 이 과정은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의 특장인 내관(內觀)을 깨워내어 무한한 외부 즉, 무용으로 가득 찬 생명의 우주를 열어준다.
곽훈이 이번에 전시하는 찻잔 그림 연작은 호모 사피엔스에 대한 오마쥬(Hommage to Homo Sapience)다. 처음으로 내관을 열 줄 알았던 호모 사피엔스의 시대는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다. 그 빈 자리에 AI를 장착한 새로운 인류가 등장하려는 듯한 조짐이 보인다. 그런 때문인지 그의 찻잔 그림은 어쩐지 쓸쓸하고 애잔해 보이기도 한다.
찻잔 그림은 외부를 격리시켜 내부의 도메인을 최소화함으로써 내관을 깨워 장소를 뛰어넘는 무한한 공간으로 향하게 하는 의식이다. 이에 반해 ‘할라잇’은 바다라는 무한한 크기의 도메인에서 갑작스레 나타나는 거대한 고래 앞에서 대상성을 상실함으로써 언어도단의 비지(非知 non-savoir)와 숭고함에 이르는 선험적 사건의 기록이다.
곽훈은 30년 전 알라스카를 여행하며 해변에서 다량의 고래뼈를 보았다. 그리고 나중에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를 보았다. 울산, 오오츠크해, 베링해, 알라스카를 연결해보았다. 곽훈의 고래 그림의 현장은 7천년 전 신석기의 어로문화가 있었던 울산이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는 여러 종류의 고래 그림과 함께 작살과 5인용 배가 그려져 있다. 이 배에 탄 사람이 몸을 던져 고래의 등에 작살을 꽂았을 것이다. 날카로운 작살은 사슴뼈를 갈아서 만든 것으로 발굴을 통해 확인되었다. 20명 정도의 사람이 탄 배는 고래를 끌고 가고 있다. 이들이 고래를 찾아 향하는 바다는 험하고 망망하다.
주체와 마주 보고 선 객체가 대상(Gegenstand)이다. 대상성이 성립하기 위해선 주체와 객체를 하나의 직선으로 이어주는 적당한 거리, 주체의 지각이 감당할 수 있는 객체의 적당한 크기 등이 담보되어야 한다. 여기에 감성, 오성, 구상력 등 여러 능력이 질서정연하게 동원되고 유기적인 합일을 이루어야만 대상성이 제대로 성립된다. 고래는 너무나 큰 생물체다. 그 크기는 지각의 포착을 불허한다. 자그마한 나무배에 탄 몇 명에 불과한 고대의 고래잡이들은 몸을 던져 고래에 최대한 가까이 육박했어야만 했다.
고래는 어마어마하게 크고 고래와의 거리는 너무나 가깝다. 너무 크고 너무 가까우면 감성, 오성, 구상력 등은 합일을 이루지 못하고, 대상성 또한 사라진다. 깊은 물 속에서 갑자기 솟구치는 거대한 고래를 상상해보자. 그건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일체의 감각, 언어, 지식이 멈추어진 무(無)의 상태, 비지(非知 non-savoir)의 경지다. 이누이트인들은 이를 ‘할라잇’(신의 강령)이라 했다. 언어도단이라는 종교적 체험의 순간이기도 하다.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대상으로 인해 주체성이 무화되고 대상성이 상실되는 데서 숭고미가 탄생한다. 곽훈의 할라잇 그림에서 나타나는 고래는 더 이상 생물체로서의 고래가 아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경이롭고 숭고한 세계의 현현인 것이다. “칸트에게 숭고미란 양면성을 띤다. 한편으로 그것은 오성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에 의해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즉 그것은 인간의 범위를 초월하는 무엇인가가 덮치듯이 주체에게 다가와, 주체는 더 이상 구성하는 존재가 아니라 말하자면 넋을 잃고 그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런 경험은 물자체의 경험과 관련된다.”(철학자 이정우) 망망대해에 떠 있는 고대인에게 덮치듯이 다가온 고래라는 존재감만큼 숭고미를 더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재료가 또 있을까.
호모 사피엔스의 시작을 알렸던 고대인, 고래를 잡던 고대인의 경건한 몸과 마음이 현재를 살아가는 화가 곽훈의 몸과 마음에도 이어져 있다. “화가는 머리가 아닌 손으로 기억하는 존재입니다 / 머리는 쪼그라든 정형정보만 기억합니다 / 손은 무한한 비정형정보를 기억합니다 / 인류의 원시적인 손이 오늘의 섬세함에 이르기까지 진화하면서 겪었던 / 공포, 중력, 원심력, 사랑, 미움, 쾌감 /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손의 이 모든 비밀스런 기억을 / 화가는 기억하고 표현해내어야만 합니다” (황인이 곽훈에게 보낸 메시지, 2022년)
오랫동안 숙고하거나 연습을 거쳐 나오는 그림보다는 우연한 스트로크에 의해 나오는 그림이 더 강한 울림을 준다고 산수(傘壽)를 넘긴 노경의 곽훈은 말한다. 그 스트로크는 고대인의 몸과 비정형 정보의 기억에 닿아있는 곽훈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몸짓이다. 고대인과 곽훈의 몸 마음은 무한한 크기의 도메인인 우주에서 서로 만난다. 노경의 곽훈은 개체적 생명에서 우주적 생명으로 점점 이동해가고 있다.
“생명에는 개체적인 생명으로서의 생(生)이 있고 우주적 생명으로서의 명(命)이 있다. 생(生)은 지각만으로도 확인이 가능하나 명(命)은 초월적인 인식의 인식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그 진면목을 포착할 수가 있다. 생과 명, 이 둘이 모두 구현되는 미술을 진정한 생명의 미술이라 한다면 곽훈의 회화는 이 지점에서 거론되어야 한다.”(황인, 생과 명의 회화, 2016년)
고래를 잡는 행위는 실용에서 출발하였으나 고래를 잡은 그 순간에서 실용을 향한 개체의 이성은 정지하고 의식은 언어도단의 초월적이고 우주적인 세계로 빠져버린다. 고래잡이에 나가지 못한 공동체의 사내는 암각화를 그리며 고래에 대한 경외심을 공유한다. 반구대에 돌을 쪼으며 암각화를 그려나갔던 고대의 어느 예술가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고래를 그렸다. 선험적으로 주어진 우주적 생명의 감각이 개체적 생명의 존재에게 조형적 표현을 부추기고 있었던 것이다.
화가란 직업은 허업(虛業)이고 그림은 무용(無用)이다. 고대의 고래잡이, 공동체의 암각화 화가와 오늘날의 화가 곽훈은 동일한 유전자를 끈질기게 공유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허업과 무용의 보람은 시공을 뛰어넘어 우주적인 생명 감각으로 서로 만나 확인할 일이다.
Teabowl and Whale: World of Uselessness and non-savoir
Hwang In (Art Critic)
The theme of the works that Kwak Hoon features in the present Gallery Yeh exhibition is teabowl and whale. It was the teapot that Kwak Hoon made his first appearance in the United States after having worked exclusively in Korea. The teapot drawing that first emerged then is recurring until now. The teapot series in this exhibition are painted 10 years after its first emergence.
‘Whale’ is a relatively new theme. In the 2012 Daegu Art Museum exhibition, ‘Kwak Hoon: Poem, Tea Ceremony, and Contemplation’, was a work titled Contemplation, a work comprising whalebone objet and teabowl painting series. There was an installation that was composed of one hundred actual teabowls as well. In the present exhibition, a drawing series of teabowls and Halaayt, a painting that portrays primitive whale hunting scenes. Halaayt is an Inuit word for the divine plan.
Small teabowl and big whale, the domain in which these two are juxtaposed seems polarized to their extremes. Kwak Hoon used to make a transfer in Tokyo when going back and forth to the United States from the Republic of Korea. One time, he visited Tokyo National Museum in Uenokoen and was touched by the exhibited Joseon teabowl. And the experience was sublimated to the theme of his drawings.
The domain where the teapot is placed is a stable agricultural domain. In the agricultural society where practicality is sufficed, teapot leads the way in extreme aesthetic ritual that transcends practicality. Teapot is a relatively small objet among the objects that we face in everyday life. What the small teapot contains is the world of infinite uselessness that transcends usefulness and practicality. The world of uselessness opens as part of the universe’s life. “I see that one small teabowl has this aesthetics that enables it to carry the heaviest weight, most complex function, and the biggest space” (Kwak Hoon in the interview with Lim Doobin, Curating Essay for Kwak Hoon: Poem, Tea Ceremony, and Contemplation, 2012). Kwak Hoon not only continuously and consistently drew teapot paintings but also installed a kiln to bake the teapot himself in his studio. However, the teapot as his ultimate pursuit is less of a realistic representation and more of a symbolic representation that embraces uselessness.
While the teapot that Kwak Hoon draws resembles I-do teapot (井戶茶碗, a traditional Joseon teapot; that has the best form for drinking matcha tea) that moved him in Tokyo National Museum, one cannot say that the painting is tied to such concrete forms. This is because the teapot that Kwak draws is not focused on the form, but on the symbolic world of the universe of uselessness and infinite life to which the teapot leads.
The world of uselessness opens through a strict and fastidious ritual. It is Kwak Hoon’s philosophy that the most important element of tea tasting is the ambiance of the teapot and the room in which people drink tea, and that the specific material and ingredient of tea that enters our body is merely trivial. In a small, closed tea tasting room, a small teapot objet denies outward senses and burgeons inward senses. Such a process evokes ‘reflection’ (內觀), the unique characteristic of the current human race, Homo sapiens, and opens up the universe of life filled with infinite externality, that is, uselessness.
The teapot drawing series that Kwak Hoon features in this exhibition is an homage to Homo sapiens. The era of Homo sapiens who opened the world of ‘reflection’ is fading gradually. The vacancy will be taken by the new human race with AI as their intellectual weapon. Perhaps that is why the teapot drawings emanate solitude and forlornness.
The teapot painting is a ritual that directs the audience toward the infinite space that transcends the space by evoking the ‘reflection’ by minimizing the inner domain through the isolation and denial of the external domain. Halaayt, on the other hand, is a recording of a transcendental event that portrays the inexplicable non-savoir and sublimity that we experience by losing the ‘object-ness’ in the face of a sudden emergence of a colossal whale in the domain of infinite size, the ocean.
Kwak Hoon saw a lot of whalebones at the shore while traveling through Alaska 30 years ago. And then he saw the petroglyphs of Bangudae in Ulsan later on. If we connect Ulsan, the Sea of Okhotsk, the Bering Sea, and Alaska, we learn that Kwak Hoon’s whale paintings are based on Ulsan’s Neolithic fishing culture 7000 years ago. In the petroglyphs of Bangudae, we see various renditions of whale paintings along with a harpoon and a boat for 5 people. It is imagined that the people on the boat would have thrown themselves with a harpoon onto the whale. It was discovered that the harpoons were made out of carved antlers. In the painting, about 20 people are on the boat struggling to drag the whale to the shore. The ocean that these people set sail to is vast and dangerous.
In German, the object that stands face-to-face with the subject is called gegenstand. For the object-ness to establish, an appropriate distance that connects the subject and the object in a linear way, an adequate size of the object that the subject’s perception can handle, etc., must be guaranteed. Here there is an orderly employment of different abilities, such as sensibility, senses, and imagination, followed by the organic synthesis of these abilities to finally establish the object-ness in its entirety. A whale is too colossal for our perception. Its size prohibits human perception. The ancient whale hunters, only a handful of them on a small wooden boat, must have approached the whale in its closest proximity imaginable and that the whale permits.
The whale is too big, and the distance is too close. In such a condition, the synthesis of sensibility, senses, and imagination cannot take place, and the object-ness disappears as well. Imagine a giant whale rushing to the surface from the deep water. This is not the object that reason can make a judgment on. It is on the level of non-savoir, a state of nothingness where all senses, language, and knowledge stop. The Inuits called this Halaayt, a God’s program. It is also a moment of Buddhist experience of inexplicability.
In the place where subject-ness is nulled and object-ness is lost due to the imperceptibly giant object, the aesthetics of sublimity is born. The whale that appears in Kwak Hoon’s Halaayt is not a whale as a creature anymore. It is the representation of the world of awe and sublimity that we cannot see with our naked eyes. “To Kant, the sublime is ambivalent. On one hand, it is passively registered by sensibility and not composed by the senses. That is, the subject loses its reason and falls into a stupor when passively accepting a certain something that transcends human boundaries darts itself into the subject. Strangely, however, such an experience is related to the experience of thing-in-itself” (Lee Jungwoo, philosopher). Is there a better material to explain the sublime than the whale that darts itself into the ancients who float around on the vast ocean?
The ancient human race that marked the beginning of Homo sapiens, the pious body and mind of the ancient race that hunted the whales are linked to the body and mind of the painter Kwak Hoon in the present time: “A painter is he who remembers by hand, not by mind”; “The mind only remembers the compact, structured data”; “The hand remembers infinite unstructured data”; The fear, gravity, centrifugal force, love, hate, and pleasure that the primitive hands of the human race experienced while evolving to the delicacy of hands that modernity sees, the secretive memories that the hand carries that cannot be explicated in words, all of these must be remembered and expressed by the artist” (A private message to Kwak Hoon by the author, 2022).
Kwak Hoon, whose ripe artistic experience is at its pinnacle over the age of 80, tells us that a painting that was done by accidental strokes gives a stronger resonance than a painting drawn by contemplation or practice over a long period of time. That stroke is a natural body language from Kwak Hoon whose body touches the memory of the unstructured data from the ancient people. He is slowly moving from the object and individual life to the cosmic life.
“In life, there is vitality as individual life, and destiny as the universal, cosmic life. One can confirm the vitality by perception only, but destiny requires a perception to transcend ordinary orbits to do it justice. If we are to call art that shows both vitality and destiny the true art of life, then the paintings of Kwak Hoon must be discussed in this context” (The author, Painting of Vitality and Destiny, 2016).
Whale hunting begins from practicality. However, the moment one succeeds in hunting the whale, the reason of the individual towards practicality stops, and the consciousness falls into the inexplicable, transcendent, and cosmic world. The man who failed to set sail to whale hunting draws petroglyphs and shares his awe for the whale in that manner. The artist who drew the petroglyphs by carving the stones in Bangudae painted the whale without any reward in mind. The senses of cosmic life that are given to humans transcendentally were pushing the existence with individual life to a formative expression.
The occupation that we call painter is an illusion, and the painting is useless. It seems that the ancient whale hunters, the petroglyphic artists, and Kwak Hoon are sharing the same genes persistently. The reward of such illusion and uselessness must be confirmed in the context of cosmic life senses that transgresses space and time.
Artist: Hoon Kwak
Date : Mar. 2nd (Thu), 2023 - Mar. 31st (Fri), 2023
Opening Reception: Mar. 2nd(Thu) 15:00~ 20:00
Venue : GALLERY YEH l 73 Garosu-gil, Gangnam-gu, Seoul, Korea
작가: 곽 훈
전시기간 : 2023.03.02(목) ~ 2023. 03.31 (금)
오프닝 행사 : 2023.03.02(목) 오후 3시 ~ 오후 8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