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70주년 기념전
화가 임군홍_Lim Gunhong, The Painter
2023.07.27-09.26
Information
<전시소개>
임군홍, 삶과 함께 한 예술
김인혜 미술사가
임군홍의 작품을 처음 보고 놀란 것은 2002년의 일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입사하자마자 미술관의 근대미술 소장품으로 전시를 급히 만들라는 ‘지시’를 받고, 소장품을 스크린하고 있었다. 이 중 1930-40년대에 제작된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임군홍의 작품들에 눈길이 갔다. 유화의 크기도 크고, 화풍도 매우 다양해서, 어떻게 이 시기 한국에 이런 작가가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소녀상>(1937)은 몇 번의 붓질로 인물의 형태를 표현해내는 기법이 압권이라 흡사 마네를 연상시켰고, <모델>(1946)은 과감한 화면 구성과 색채 선택이 마티스 못지않은 대담성을 보였다. 한 화가가 평생을 모색해도 하나의 양식을 만들기 어려운데, 임군홍이라는 화가는 어떻게 이런 다양한 양식을 짧은 시기에 섭렵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작품의 소장 경위를 조사해보니,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임군홍 작품 5점은 1985년 월납북 작가 해금 무드가 고조되던 시기 그의 개인전을 미술관에서 개최한 후, 유족으로부터 기증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시 막바지에 마침 그 유족, 임군홍의 차남인 임덕진 선생이 미술관을 찾아주었고, 그렇게 유족과의 인연도 시작됐다. 아버지의 작품을 평생 보관하며, 그림을 통해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그는, 여전히 임군홍의 작품을 시장에 내놓기보다 잘 보존해서 공공의 자산으로 만들고 싶다는 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시장에 작품이 나와서 몇 억에 팔렸다는 기사가 나야, 그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는 세상이 아닌가. 임군홍이라는 작가를 대중에게 좀 더 알리고 싶다는 오랜 열망을 안고, 일단 임군홍의 작품을 모조리 펼쳐 보이자는 심산으로 이번 예화랑 전시가 준비된 것으로 안다.
1. 성장과 창업: 회화의 매력
임군홍(본명 임수룡)은 191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원래 그의 선조는 무관 출신이었고, 아버지는 거상(巨商)이었던 부유한 집안이었다. 개화기에 상업에 종사한 만큼, 시대의 변화와 조류에 민감했던 개방적 집안이었다고 생각된다. 어머니는 경주 최씨로, 그 시절 대단한 가문의 부잣집 출신이었다.
임군홍은 9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형제들이 대부분 일찍 죽어서, 종래에는 임군홍이 부모님을 모시며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임군홍의 그림에 종종 등장하는 임군홍의 형이 원래 있었는데, 그가 사회생활을 못하게 되면서 집안이 급격히 곤궁해졌다. 형 임점룡은 경기고등보통학교를 전교 2등으로 졸업할 만큼 총명하여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나, 일본 유학 중 일본인 여성을 사귀었다는 이유로 강제 귀국 당했다. 이후 아버지의 강압으로 조선인 여성과 결혼했으나 며칠 못 가 헤어진 후, 평생 문밖을 나오지 않는 정신적 고통 속에 살았다. 임군홍의 부친은 장남이 그렇게 되자 투전에 빠져, 결국 가산을 탕진해 버린다. 임군홍이 주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해야 했던 1920년대 말 집안 상황은 그렇게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는 어머니의 친척이 운영하는 치과에서 기공사로 일을 하며, 가계를 책임져야 하는 위치가 되었다.
임군홍이 미술에 재능을 보인 것은 주교보통학교 재학시절이었다. 이 학교에는 김종태(1906~1935)라는 걸출한 인물이 교사로 있었다. 김종태는 거의 독학으로 유화를 연마하여,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다가 조선인 최초로 서양화부 추천작가가 된 화가였다. 애주가(愛酒家)이자 안하무인의 기인(奇人) 행각으로 유명했던 그는, 천재적인 감각으로 몇 번의 붓질만으로 대상의 원근감과 볼륨감을 잡아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의 대표작 <노란 저고리>(1929)를 보면, 어린 소녀의 앳된 인상과 한복의 주름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데, 가까이에서 다시 보면, 이런 표현이 불과 몇 번의 대담한 붓질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는 이런 작품을 워낙 빠른 필치로 소화해서, 20분 만에 작품을 완성했다고 하니, ‘마술’ 같은 실력이었다.
임군홍은 그런 김종태의 탁월한 능력을 좇기 위해 애쓴 것으로 생각된다. 임군홍이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초기작에 김종태의 영향이 확연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소녀상>(1937)이 대표적인 예이다. 임군홍은 ‘노란 저고리’ 대신, 진한 남색의 세련된 원피스를 입은 신여성을 그리고 있지만, 발그레한 볼터치나 흰색 칼라의 주름 처리에서 김종태의 영향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대담한 붓질로, 이차원의 평면 캔버스에 입체적인 형태감을 표현하는 회화의 신비한 매력에 빠져서, 그는 이러한 기법을 더욱 연구하고 연마해나갔다.
1930년대 임군홍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에서 운영하는 야학을 다녔으며, 틈틈이 개인 화숙에서 회화 공부를 계속했다. 그리고 그는 계속 그림을 그리면서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1936년 임군홍은 치과에서 함께 일하던 신여성 간호사 홍우순과 연애결혼을 한 후, 이듬해 ‘예림스튜디오’라는 세련된 이름을 내건 디자인회사를 창업했다. 간판 제작에서부터 포스터 디자인, 무대장치, 실내장식 등을 사업 분야로 내걸었다.
2. 중국 생활과 화가 활동
1) 중국 진출과 한커우 정착
임군홍은 자상하고 따뜻하고 책임감이 강한 가장(家長)이었다. 연로하신 어머니와 문간방에서 나오지 않고 책만 읽는 형님, 그리고 부인과 자녀들을 부양하면서, 그는 화가로서의 꿈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두 가지를 모두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모험을 걸어야 했다. 사업의 중국 진출에 도전한 것이다.
1939년 임군홍은 먼저 혼자 중국 일대를 주유하며, 사전답사 겸 스케치 여행을 떠났다. 만주를 거쳐 베이징 일대를 여행하며 틈틈이 작품을 제작했고, 돌아오는 길에 당시 만주국의 수도 신징(新京, 현 장춘)에서 《김혜일, 임군홍 이인전》을 성황리에 개최하기도 했다. 숨 막히는 일제강점기 한반도를 피해 만주에 터를 잡았던 만선일보사의 문예인들, 염상섭과 박팔양 등이 찬조회를 조직하여 열어준 전시회였다.
중국에서 사업의 가능성을 본 임군홍은 1940년 부인과 함께 한커우(漢口)에 정착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절친이었던 엄도만과 동업하여, 화루가(花褸街) 45번지에 ‘한커우 미술광고사’를 열었다. 경성에서 시작했던 디자인사업의 확장판으로, 영화관이나 벽화 광고, 버스 광고, 실내 인테리어, 기념 카드나 엽서의 제작 등 다양한 디자인 및 인쇄 사업을 펼쳤다.
한커우는 현재 중국의 우한(武漢)에 해당하는 곳이다. 원래 이 지역은 양쯔강과 한수이(漢水)강을 사이에 두고 구분되는 한커우, 한양(漢陽), 우창(武昌)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가, 1927년 ‘우한’으로 통합, 명명되었다. 우한은 중국 대륙 한복판에 위치해 있다. 내륙이면서도 ‘중국의 시카고’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는, 우한이 거대한 장강(長江, 양쯔강)을 따라 대륙 깊숙이 들어온 곳에 위치한 중요 항구도시이기 때문이다. 1858년 텐진조약으로 강제 개항된 이후, 우한은 일찌감치 여러 나라 조계지가 들어선 식민지적이면서 국제적인 모습을 갖춘 도시가 되었다.
우한은 양쯔강을 통해 황해에서 엄청나게 많은 배들이 동서를 가로질러 내륙으로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뱃길이었으며, 동시에 한수이강을 통해 대륙의 남북으로도 이어지는 접점에 위치해 있었다. 또한 1906년에는 한커우에서 베이징을 연결하는 경한철로(京汉铁路)가 완성되었고, 1936년에는 우창과 광저우를 잇는 철도가 개설되면서, 뱃길과 철길이 만나는 최고의 교통 요지가 되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우한 주변에는 각종 지하자원의 매장량이 풍부해서, 공업이 발달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 한커우에서 한양 쪽을 바라보며 그린 임군홍의 스케치에 높은 공장 굴뚝들이 열을 지어 등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같은 시기 조선에서는 볼 수 없던 첨단 산업공단이 우한에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임군홍은 한커우의 번화한 항구와 철도역 등 도시의 중요 상징물을 작품으로 남긴 적이 있다.
1939년부터 1940년까지 한커우에 머물렀던 역사학자 이정식의 회고록을 보면, 이 시기 한커우가 얼마나 번화했으며, 또한 위험천만한 도시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우한의 일본인 조계지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이정식은, 중일전쟁 중 주변 지역에서 격전을 벌이고 참패하여 본영으로 돌아오는 일본군 행렬을 몰래 보다가 들켜서, 잡혀갈 위기를 간신히 모면했던 일화를 전하고 있다. 우한은 이 시기 중일전쟁의 접전지로, 돈도, 물자도, 군인도, 사람도 많이 들고났던, 도전적인 동시에 위험한 도시였다.
2) 중국에서 그린 작품: 한커우 vs 베이징
리스크를 건만큼 사업도 크게 성공했다. 임군홍은 한커우에서 디자인, 광고, 인쇄 사업으로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중국과 조선에 있는 가족을 부양하는 동시에, 자신의 꿈인 그림 그리는 일을 틈만 나면 실행할 수 있었다. 약 6년간의 중국체류 기간 동안 임군홍은 한편으로 한커우에서 생업에 종사하며 주변의 인물과 풍경을 그렸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말마다 기차를 타고 베이징에 가서 ‘화가’로서의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마음껏 펼쳤다.
흥미로운 점은, 한커우와 베이징 두 곳에서 각각 그린 그의 작품들은, 작품의 소재뿐 아니라 화풍에 있어서도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먼저 한커우에서 생활인으로 사는 동안, 임군홍은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 즉 가족과 이웃을 주로 그렸다. 그의 아들과 딸이 여기서 태어났으니, 화가의 자녀와 아내가 작품의 소재가 된 것은 당연했다. 임군홍이 그린 여러 점의 가족 그림은 이들을 바라보는 따뜻하고 애잔한 느낌이 그대로 전달되어, 보는 이에게 생생한 감동을 준다. 임군홍은 또한, 항구의 뱃사람, 정육점 주인, 화루가의 평범한 일상 풍경 등을 화폭에 담았다. 국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듯, 작품에는 중국인과 서양인 등 다양한 인종이 등장하기도 한다.
화풍의 측면에서 보면, 한커우에서 제작된 그림은 상대적으로 사실적이고 기록적이며, 조금은 어둡고 우울한 정조를 띈 경우가 많았다. 그의 한커우 생활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커우에서 그린 작품 중 가장 압도적인 두 작품은 <여인상>과 <행려>이다. <여인상>은 중일전쟁의 혼란 속에서 가슴을 유린당해 유두에 구멍이 뚫린 여성의 지친 모습을 그린 작품이고, <행려>는 온 몸이 헐려나간 채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는 나병 환자의 남루한 모습을 담은 것이다. 이 두 작품에서도 임군홍은 각기 다른 화풍을 구사했는데, 전자의 작품이 검은 윤곽선과 두껍고 거친 붓질을 강조한 표현주의적 경향을 띤다면, 후자는 어둡고 단조로운 색채에 극적 명암표현으로 형태를 잡은 인상주의 양식에 가까운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은 화가가 곤경에 처한 주변인들에게 얼마나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인물이었는지를 보여주는 한편, 기법적으로는 그가 대상의 소재에 따라 얼마든지 수시로 그림의 양식을 바꿀 수 있는 화가였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주말이나 연휴가 생기면 임군홍은 어김없이 기차를 타고 베이징으로 향했다. 베이징에서 그는 ‘화가’로서의 자신의 모습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작품의 분위기도 대체적으로 한커우에서의 작업에 비해 밝고 활기찼다. 그는 베이징에서 야외 사생을 주로 했는데, 특히 그림그리기를 좋아하는 ‘스팟’이 있었다. 베이징의 상징인 자금성(당시는 주로 ‘고궁’이라고 불렀다), 자금성 외곽의 각루, 그리고 베이징 서북쪽 교외에 위치한 이화원 등이 그가 자주 가는 장소였다. 도교의 전통 사상을 상징적으로 조형화한 천단공원의 ‘기년전’도 그가 좋아했던 곳이었다. 이 특정 장소를 매우 반복적으로 방문한 화가는 그때마다 각기 다른 계절과 날씨, 시각, 그리고 화가의 다양한 감흥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작품을 여러 개의 버전으로 그려나갔다.
이는 모네가 루앙 대성당을 그리고, 세잔이 생 빅토와르 산을 반복해서 그린 것과 유사한 작업 방식이다. 그러나 임군홍이 이들의 작품과 달랐던 점은, 같은 대상을 놓고도 작품의 양식이나 작품이 주는 ‘효과’가 매우 폭넓고 다양했다는 사실에 있다. ‘기년전’ 시리즈만 하더라도, 어떤 작품은 밝게 반짝이는 빛의 향연을 통해 생생하고 화사한 느낌이 강조된 반면(도판 8), 어떤 작품은 매우 흐릿하고 어둡고 불길한 분위기가 화면을 엄습하는 식이다(도판 9). 유럽 인상주의 화가들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빛의 관찰에 기초한 작업을 했다면, 임군홍은 대상을 통해 자신이 느낀 직접적인 ‘감흥’ 자체에 훨씬 더 집중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일종의 ‘정조(情操)’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생생함, 쓸쓸함, 적막함, 고요함, 아련함, 평온함 등과 같은 다양한 정조가 임군홍의 베이징 풍경화를 지배한다. 그는 이런 정서를 회화라는 매체를 통해 표현해낼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화가였다.
한편, 베이징에 가면 임군홍은 골동품 거리 유리창에 반드시 들러서, 조선시대 중국을 드나들었던 조선인의 글씨나 그림을 사서 경성으로 보내는 일도 했다. 간송 전형필이 임군홍의 주고객이었다. 임군홍의 이런 ‘발굴’로 인해, 어떤 자료가 간송미술관에 유입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도 향후 흥미로운 연구과제가 될 것이다.
3. 귀국과 월북: 미완성의 ‘가족’
한커우에서 그는 다복한 가정을 꾸렸고, 사업도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1945년 2차 대전이 종결되어 한반도 정세는 급변했고, 중국은 극심한 내전 상황으로 내몰렸다. 임군홍은 어수선한 시국을 피해, 1946년 초 귀국길에 올랐다.
정치적으로도 사상적으로도 혼란 그 자체였던 해방공간에서, 임군홍은 여전히 자신의 사업을 계속했다. 골동을 취급하는 일은 ‘우보당’이라는 상점에서, 디자인 및 인쇄 관련 일은 ‘고려광고사’라는 회사에서 운영했다. 번화한 중국의 대도시에서 일했던 노하우를 적용하여, 서울에서도 대규모 일거리를 따냈다. 전국 기차역의 광고판을 운영하거나 지역 관광지의 홍보 브로슈어를 제작하는 일도 했다. 운수부(교통부에 해당)에서 의뢰한 신년 달력을 제작하는 일도 따냈는데, 거기서 사달이 났다. 1948년도의 신년 달력에 그린 그림이 문제가 되어, 경찰 조사를 받게 된 것이다.
1948년 3월 10일자 경향신문과 조선중앙일보 기사 내용을 보면, 철도운수국 여객계의 서기 이덕구는 “남로당 철도국 본국분회 서기부장 겸 운수과 세포 책임자”로 “화가 임군홍과 엄도만과 공모하여” 운수부의 홍보달력에 “남조선 과정(過程)을 전복하고 소련식 공산주의국가를 건설하는 의미의 도면을 그렸다”고 되어 있다. “인물은 최승희로 하고, 그가 쓴 갓은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적색으로 하고, 갓끈에는 소련의 17연방을 의미하는 구슬 17개를 그리고, 최승희가 소지한 부채에는 삼팔선을 상징하는 선을 그렸다”는 식으로 도안을 해석했다.
기사 내용에 의하면 타깃이 된 인물은 운수국 내부 좌익 성향의 서기 및 과장급 인사들로 보이는데, 정확히 알 수 없는 정치적 알력에 임군홍과 엄도만 두 화가는 희생양이 되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들이 그린 그림이 1946년 7월 월북한 최승희인지 혹은 그녀를 닮은 일반적인 무용수인지조차 정확히 확인할 길이 없다. 도안에 대한 묘사 내용을 보면, 달력 그림은 단순히 ‘한국미’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이미지의 종합판이었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두 화가에게 회복할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이들은 수개월간 조사를 받고 옥고를 치른 후, 1948년 5월 제헌 국회의원 선거 직전에 국민대통합 차원에서 풀려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미군정청 군정장관이었던 윌리엄 프리시 딘(William Frishe Dean)이 1948년 3월 31일자로 발행한 특별 사면서에 임군홍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면서에는 대상자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즉시 사면하며, 시민권과 선거권을 보장하라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사면 복권된 후 임군홍은 수염을 깎지 못하고 초췌하기 그지없는, 짧은 시간에 노인의 모습이 되어버린 자신의 자화상을 남겼고, 새장 속에 갇힌 초라한 새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억울한 이야기를 글로 남길 수도 없던 시절, 그는 그림을 통해 당시의 심경을 기록했던 것이다.
1950년 6월, 남북의 정치 상황이 극단에 치달아 전쟁이 터졌다. 임군홍은 이 무렵 명륜동 집에서 <가족도>)를 그리고 있었다. 곤히 잠든 차남 임덕진을 끌어안고 상념에 잠긴 부인의 모습, 턱을 괴고 천진하게 앉아있는 장녀가 등장하는 그림이다. 부인의 배 속에는 유복자로 태어난 막내가 있는 상태였다. 집 안에는 각종 골동품들이 이리저리 놓여 있고, 뜰 앞에 핀 백합이 삐죽 화면에 끼어들어 있다. 임군홍이 평소 좋아하는 것들을 종합선물세트처럼 한 화면에 구성한 작품이다.
미완성에 그친 이 그림은 임군홍이 남한에서 그린 마지막 유작이 되었다. 1950년 9월 국군의 서울 수복 후, 임군홍은 북으로 갔다. 한때 좌익으로 찍힌 그가 일단 생존하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북으로 간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했듯이, 몸을 피한 순간의 선택이 영원히 남쪽의 가족과 이별하는 결과를 낳게 될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부인 홍우순은 시어머니와 시아주버니, 그리고 다섯 자녀의 생계를 위해 처음에는 골동품을 팔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뛰어난 음식솜씨를 발휘하여 배오개 시장(광장 시장)에서 간이식당을 꾸렸다. 그리고는 2평짜리 자신의 가게를 갖게 되면서, 평생 과일과 야채를 파는 장사를 해서 식구를 먹여 살렸다. 홍우순은 1982년 타계할 때까지 임군홍의 ‘부활’을 보지 못했다. 부인이 액자도 없이 캔버스 천을 돌돌 말아 부피를 줄여 상자 속에 몰래 보관해오던 작품들은, 1984년 차남 임덕진을 통해 처음 빛을 보게 되었다. 그 후로도 언 40여년의 세월이 지났건만, 아직도 임군홍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낯선 것은 통탄할 일이다.
4. 임군홍 작품에 대한 재평가
현재 남아있는 임군홍의 유화 작품은 약 130점에 이르는데, 이는 모두 1930년대 중반에서 1950년까지 약 15년 사이에 걸쳐 제작된 것이다. 이 시기 조선의 화가들 중에서 이 정도 규모의 유화 작품을 남긴 이는 매우 드물다. 임군홍 외에는 배운성, 이쾌대 등 주로 월북한 화가들이 1930-40년대 작품을 상당량 남한에 남겨 놓았을 뿐이다. 박수근, 이중섭 등 월남한 화가들이 이 시기 작품을 모두 북에다 남겨두고 내려온 것을 생각하면,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우리에게 남겨진 이 작품들은 일제 강점기 조선의 양화계를 이해하고 실증하는 데 있어 너무나도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임군홍의 작품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앞으로 좀 더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는 한편으로는 생계를 위해 디자인 사업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화가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위해 고투했다고 볼 수 있다. 생계로 시작한 것이라 해도 디자이너로서의 임군홍 또한 그의 선구적인 역할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으며, 화가로서의 임군홍의 위치도 재평가될 여지가 많다. 특히 종래의 해석에서 임군홍의 작품이 단지 여러 서양의 양식을 모방하고 시도한 것에 그쳤다는 평가는 재고를 요한다. 그의 작품이 다양한 양식을 받아들인 것은 맞지만, 그는 이 양식들을 화가가 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정감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서 ‘활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임군홍은 무엇을 대상으로 어떤 느낌을 표현하고 싶은지를 먼저 생각한 후, 매우 주도적인 방식으로 기법과 양식을 자유자재로 선택하고 구사했다. 성공한 디자이너로서 임군홍이 가진 유연하고 도전적인 태도가 회화 작품을 제작하는 데에도 일정 정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고, 서양화의 여러 화풍을 소화해 나갔으며, 종국에는 자신이 대상을 대면한 순간 느낀 ‘정감’을 자유자재의 회화 기법으로 구현해낼 수 있었다. 이러한 진전의 과정은 화가 스스로에게 대단한 기쁨과 성취감을 안겼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임군홍이 온갖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화가이기를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일 것이다.
ʻ화가 임군홍_ Lim Gunhong, The Painterʼ를 준비하며
화가 임군홍을 아시나요?
사실은 저도 작년 12월 신문 기사를 보고 묘한 직감을 느껴 알게 된 작가입니다. 우리는 왜 모네, 앤디워홀, 렘브란트 등 해외 유명 작가들은 줄줄 외면서 임군홍이란 작가는 모르고 있을까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생각 할 여유도 없이 무조건 이 작가를 알리고 이 작가의 작품을 보이고 이 작가와 관련된 이야기, 1950년 아버지와 생이별을 한 이후 73년간 많은 작품들을 고이고이 간직하고, 아버지의 작품과 평생 대화를 하고 살았던 아들 스토리를 많은 분들과 함께 느끼고 싶어 이 전시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작품 한점이 수천 만원 수억을 호가하며 작품이 화폐를 대신하는 세상이 되어 가지만, 불과 80, 9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림은 아예 팔리지 않았던 것이었기에 다른 생계 수단을 이용하면서 가족을 부양하며 그림을 그려야만 했던 시절을 살아가야 했던 작가 임군홍이 있었습니다.
1930년 40년대에 이렇게 훌륭한 작가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의 예술세계를 온전히 펼쳐 많은 작품들을 한 자리에 놓고 우리의 파란만장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된 한 작가와 한 가족의 예술에 대한 인생을 논할 자리도 없었습니다. 45주년 전시를 바로 마치고 예화랑은 더이상 늦출 수 없는 마음에 이번 전시를 준비했습니다.
유족 임덕진의 글
저는 화가 임군홍의 둘째 아들 임덕진이라고 합니다. 어머님의 큰 보살핌으로 탈 없이 대학까지 졸업을 하고 6~7년간 직장 생활을 하다가 79년 뜻하지 않는 일로 직장을 물러가고 어머님께서 우리들 모두의 삶을 책임지고 힘겹게 이어가시는 종로 광장시장에서 평생 장사를 해온 시장 상인이자 평범한 시민인 제가 이번에 아버님 전시를 맞아 이렇게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제게는 무거운 숙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작품 세계를 어떻게 하면 세상 사람들에게 알릴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예화랑과 그야말로 ‘운명적’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인연이 되어 여러분들과 만나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과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감개무량할 따름입니다.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아버지’란 말
저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습니다. 한 번도 입 밖으로 ‘아버지’ ‘아빠’라는 이름을 불러본 적도 없습니다.
아, 딱 한 번 있긴 있었네요. 10여 년 전 환갑 여행으로 친구들과 백두산 여행을 갔었습니다. 한발짝이라도 더 아버지 곁으로 가고 싶어 오래전부터 계획한 일이었지요. 그날따라 날씨가 너무 좋아 백두산 천지가 다 보였습니다. 그 천지 앞에서 저는 ‘아버지이~’를 마음껏 온 힘을 다해 외쳐 불렀습니다. 얼마나 눈물이 쏟아지던지요.
함께 갔던 친구들조차 그제야 저의 한(恨)과 사연을 알았다면서 어찌할 줄을 모르며 위로를 하더군요. 제게 있어 아버지에 대한 모든 것은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아버지는 제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분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저는 1948년생입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는 아버지가 그 전해인 1947년에 월북 무용가 최승희를 달력에 그려 넣었다며 경찰에 붙잡혀가 5, 6개월 정도 옥고를 치르고 난 뒤였습니다. 성품이 워낙 인자하시고 남들에게 베풀기 좋아하며 어려운 사람 돕기를 좋아했던 아버지를 풀어주어야 한다고 미군들까지 탄원서를 써서 48년 5.10 총선을 앞두고 사면 복권되어 출소하신 상태였습니다. 감옥에서 아버님이 읽고 싶다고 영치품으로 넣어드렸던 일본
책 ‘서양미술사’를 아직도 제가 보관하고 있는데 감옥에서 그 책을 내준 날이 1948년 3월 28일로 되어있더군요. 그러니까 이 날이 아버님이 출소한 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버지는 감옥 안에서도 공부하기를 즐기셨는지 책에는 연필로 줄이 그어진 구절들이 많습니다. 저는 가끔 그 책을 들여다보며 감옥 안에서도 열심히 공부를 하셨던 아버지 얼굴을 상상하곤 했습니다.
●우리 집안의 금기였던 이름 ‘임군홍’
출소해서는 아무래도 주눅이 많이 드셨겠죠. ‘좌익’이니 ‘빨갱이’라는 낙인도 찍혔을 테고요. 생전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외부 사람들도 아버지가 출소한 뒤부터는 저희 집안 출입을 꺼렸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아버지가 달력을 제작하면서 돈이 많이 들어 경제적으로도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앞에 언급한 ‘서양미술사’책에는 허정 내각 이름으로 구백몇십만 환인가를 반납하라는 영수증도 있었으니까요.
저의 친할머니는 저의 탄생을 썩 마뜩지 않아 하셨다고 합니다. 저한테도 생전에 ‘네놈이 뱃속에 들어가 있을 때 네 아버지가 영창에 잡혀 들어갔다’고 말씀하셨으니까요. 큰형에 이어 7년 만에 나온 아들이었는데 말이죠. 어머니는 시집가서 5년 만에 중국에서 큰아들을 얻으시고 딸을 내리 둘을 낳으신 뒤 저를 얻으셨습니다.
게다가 제가 태어난 때가 추석 명절 즈음이어서 명절 준비를 해야 하는데 며느리가 몸 풀고 누워 있으니 시어머니인 할머니 입장에서는 차례 준비도 제대로 못하면서 며느리 야단도 못하는 그런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짐작이 됩니다.
아버지는 예술가이면서 사업 수완도 좋았는지 중국에서 광고 사업에 성공해 한때 저희 집은 서울에서 ‘큰 부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아버지가 옥고를 치르는 바람에 가세가 확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1950년 6.25가 터져 북한으로 끌려가게 되면서 어머니는 혼자 시어머니, 다섯 자식, 큰시아주버니까지 여덟 명을 부양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저희 집안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일종의 금기였습니다. 어렸을 적 간간이 일본에서 누가 이북에 있는 아버지 소식을 갖고 왔다는 둥 하면서 어른들이 수군거리던 장면이 기억납니다. 저는 아버지가 북한으로 가셨다는 얘기도 커가면서 대충 눈치로 들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커서 “어렸을 적 아버지 없는 설움을 겪어본 적이 없느냐”라고 사람들이 물을 때면 “그 당시는 그런 걸 표현할 수도 없었고 표현한다 해도 알아주는 사람도 없어서 거의 생각도 안 하고 살았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저의 솔직한 심정이 그랬습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딱 한 번 들었던 때는 혜화초등학교 졸업식에서였습니다. 4.19가 난 이듬해이니 1961년이네요.
어머니는 장사를 대충 마치고 거의 졸업식이 다 끝날 무렵 부랴부랴 달려오셨습니다. 졸업생들도, 학부모들도 다 가버린 텅 빈 운동장을 가로질러 총총걸음으로 서둘러 걸어오시는 어머니를 만났는데 참 슬펐습니다. 옛날에는 이런 얘기를 하면 눈물이 저절로 펑펑 흘렀는데 지금은 눈물도 마른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그 와중에 그래도 멋을 내신다고 오랜만에 좋은 옷에 평소에 안 하시던 목도리까지 걸치고 오셔서 저를 데리고 지금 플라자 호텔 뒤 북창동 중국 집으로 데려가셨습니다. 거기서 우리 두 사람은 짜장면과 만두를 먹었습니다. 나름대로 우리만의 세리머니였던 거죠. 그날따라 아버지 생각이 유난히 많이 났지만 어린 마음에도 어머니가 슬퍼할까 봐 티를 내지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운명처럼 옭아맨 연좌제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가 집안 형편이 제일 어려웠던 때 같습니다. 2학년, 3학년 때는 학비를 못 내서 학교에서 쫓겨날 뻔한 적도 있었으니까요. 졸업할 때는 아버지와 함께 살던 명륜동 집을 팔고 화동에 있는 옛날 경기고등학교 뒤 이모네 문간방 집으로 온 가족이 옮겨갔습니다.
당시 중학교는 시험을 쳐서 들어가던 시절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서라벌 중학교에 원서를 써줬는데 미아리 고개 넘어 다녀야 하는 너무 먼 거리였습니다.
제 소식을 들은 간송 전형필 선생 사모님이 “보성 중학교로 오라”라고 하셨는데 어머니가 “빽으로 들어가는 건 옳지 않다”라며 거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간송 선생과는 아버지가 중국에 왔다 갔다 하시면서 좋은 옛 물건들을 많이 소개했는데 그걸 사 주신 인연이 있습니다. 아버님을 아주 좋아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계셨던 중국 우한시 한커우는 국제도시여서 귀한 물건들이 많았다고 하더군요. 아버지는 거기서 큰 규모의 광고 회사를 경영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서라벌 중학교에 합격은 했는데 등록금을 못 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연락이 와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이 됐는데 왜 등록을 안 했느냐”라고 해서 사정 설명을 하고 입학식 날이 되어서야 겨우 돈을 마련해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때 입학을 못 했으면 당시 저희 집 사정으로 재수는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니 저는 ‘국졸’로 끝날 뻔했습니다. 그러면 광장시장에서 진짜 장사의 신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고 말이지요. (웃음)
어머니는 광장시장 두 평짜리 가게에서 야채와 과일을 팔았는데 자리도 좋았지만 중국 말, 일본 말에 능통하신 것이 장사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1965년도 한일 국교정상화가 되면서 일본 관광단이 광장시장 오면 제일 먼저 우리 가게를 찾았습니다. 다행히 중학교 다니는 동안 집안 형편이 조금씩 피기 시작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이모네 집에서 나올 수 있었으니까요. 판잣집 같은 낡은 집이었지만 독립을 했고 제가 고등학교 들어가면서는 종로 인의동 광장시장 바로 앞에 방 두 개짜리 집에 들어가게 됩니다. 저도 대광 고등학교를 거쳐 1967년 경희대 화학과에 들어가게 됩니다.
아버지의 부재를 실감한 첫 번째 사건은 대학 입학할 때였습니다.
저는 사실 육군사관학교에 가고 싶었습니다. 성격이 좀 꼬장꼬장한 데가 있어서 군인이 참 좋고 멋있어 보였습니다. 어머니한테 말했더니 단칼에 ‘연좌제 때문에 안 된다’고 하시더군요. 학교에서도 원서조차 써주지 않았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군인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2학년 1학기 끝나면서 ROTC 신청을 했는데 그것도 안 된다고 하더군요. 1968년이었는데 북한에서 무장공비 김신조가 청와대를 습격했던 일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반(反) 김일성, 반 북한 감정은 고조되어 있었고 북으로 간 아버지를 둔 저 같은 아들은 이미 집안에서나 학교에서나 ‘빨갱이 아들’로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꿈도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낙심하고 있던 어느 날 저녁, 집에 종로구청 사람들이 왔습니다. 왜 왔나 했더니 어머니가 제 호적을 큰아버지 아들로 바꾼 거였습니다. 이로써 우리 아버지는 저희 작은아버지가 되고 큰아버지가 호주로 되었으니 엄마하고 큰아버지가 부부가 된 거죠. 어머니는 그렇게라도 호적을 바꿔서 제 신분을 세탁하고 싶었던 거였지만 연좌제는 오촌에 육촌까지 다 걸려서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는 이 참에 병역의무나 빨리 마치고 싶어서 군대에 자원 입대해버렸습니다. 그렇지 않아도‘요주의 인물’로 찍혀 있으니 당연히 제일 힘든 전방에 보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인생이란 게 정말 아이러니한 것이 웬일인지 후방 의무대로 배치되어 군 생활을 나름대로 편하게 했습니다.
“장군이나 장관 아들들만 오는덴데 누구 빽으로 왔느냐”라고 상관들이 물어볼 정도였으니까요. 나중에 알고 보니 ‘임군홍’ 빽이었습니다. 빨갱이 자식을 전방에 보내면 월북할지 모른다고 아예 후방으로 뺀 거였습니다.
복학 후 졸업반이 되어 직장을 알아보다 서울 영등포에 있는 염료제조회사에 들어갔습니다. 지금은 상장도 한 회사인데 총 20여 명 지원자 중 마지막 합격생 두 명 중 하나였습니다.
7년 직장 생활하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그야말로 평범한 샐러리맨이 되어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경쟁 회사로 이직을 하는 과정이 알려져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제가 시험 보고 입사한 흔치 않은 대학 졸업자이다 보니 1978년에‘봉급 인상안’을 만들어 달라는 후배들의 청을 들어준 적이 있는데 그 일로 미운 털이 박혀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어느 날 회사 임원이 부른다고 해서 갔더니 ‘당장 사표 쓰고 나가라’고 해서 그날로 나와 버렸습니다. 1979년 6월인가, 7월이었습니다. 여기저기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는데 몇 달 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는 10.26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터지면서 제 운명도 바뀌게 됩니다.
●아버지를 공부하다
사회 분위기는 잔뜩 얼어붙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시장에서 어머니 일을 돕고 있는데 서울시경 외사과라는 곳에서 형사가 나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민심이 흉흉한 때이다 보니 연좌제로 찍혀 있던 저는 요주의 인물이었던 겁니다.
어머니는 가게 앞을 육탄으로 막아서면서 “임덕진이는 이제 장사에 다른 거 할 생각도 없으니 제발 가 주시라”라고 사정하는 바람 저는 겨우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의 장사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장사를 해보니 다행히 월급쟁이보다 나았습니다. 특히 가을에 송이 장사가 효자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도 규모가 크지만 당시에는 동네마다 슈퍼도 없던 시절이다 보니 광장시장은 대한민국 1등 쇼핑몰이었습니다.
4년제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시장통에서 장사를 하기까지에는 결심이 많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지 영향도 있었겠지만 출세나 성공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저 마누라랑 아이들이랑 도란도란 같이 살면 그게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빨갱이 자식’이라는 낙인 때문에 꿈을 못 펼칠 때에도 비관적인 생각보다는 ‘그저 모든 걸 운명으로 받아들이자’는 쪽이었습니다. ‘그냥 안 되는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구나’면서 말이죠. 무엇보다 여자 혼자 몸으로 장사하는 어머니가 안쓰러웠습니다. 시장 관리인들한테 구박도 받고 여기저기서 삥 뜯어가는 곳도 많았고요. 말도 함부로 하고 물건도 걷어차는 손님들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소방서에서 늦은 밤에 가게에 불을 켜 놓았다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때는 전기가 모자라던 시절이어서 조명의 조도를 제한받던 때였는데 밤 11시에도 손님들이 와 ‘조명’이 중요한 데 늦게까지 촉수가 높은 전구를 사용했다고 벌금을 맞은 겁니다.
젊은 혈기에 불합리나 부조리를 보면 참을 수 없었던 저 때문에 어머니는 시장 관리사무소로 불려 가서 반성문을 세 번쯤 썼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저에게 야단을 치신 적이 없었습니다. 저 역시 점점 참는 걸 배워갔습니다. 광장시장 상우회 총무도 하고 회장도 했습니다.
그러다 어머니가 1982년에 돌아가십니다. 그때 유언이 ‘아버지 그림들을 꺼내서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으면 좋겠다’는 거였습니다. 어머니 살아생전 한번 해드리고 싶었는데 못했다면서 말이지요. 그림들을 꺼내도 누가 알아주지도 않을 테지만 그래도 꺼내서 한 번 전시를 하든가 아니면 나중에 2층 양옥집이라도 사서 잘 걸어놓고 보여주라는 거였습니다. 그림 관리를 제게 맡기시면서 말이지요.
생전에 어머니는 아버지 그림을 끔찍이도 아끼셨습니다. 명륜동 집을 팔고 이모네 문간방으로 이사 갈 때에는 외삼촌 집에 모두 맡기셨어요. 종이 박스에 신문지를 한 장 한 장씩 끼워서 말이지요. 다른 살림은 버리더라도 그림은 물론 화구며 물감, 아버지가 보던 책, 관련 자료 등 아버지에 관한 건 하나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보관하셨습니다. 광장시장 옆에 겨우 집 한 칸 마련해 외삼촌에게 맡겼던 아버지 그림들을 다시 가져오던 날, 어머니는 밤새 우셨습니다.
그림에 대해 전혀 문외한이었던 제가 미술에 관한 공부를 독학한 것은 어머니의 유언 때문이었습니다. 하여튼 이 일을 완수해야 내 생활도 편하고 마음도 편하다, 그게 자식 된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 때부터 교보문고고 어디고 시간이 날 때마다 책과 그림을 보러 다녔습니다. 월간미술도 1월호부터 찾아보고 정기구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화랑협회’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당시 협회장이었던 예화랑의 대표, 지금은 따님이신 김방은 대표의 아버님이신 김태성 회장님을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아버지 그림 몇 점을 들고 말이지요. 김회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옛날에 천일화랑 하셨던 이완석이란 분이 아버지를 많이 아끼셨다”라고 하니 깜짝 놀라셨습니다. 저는 사실 회장님이 ‘완석이 아저씨’ 사위인 줄도 몰랐습니다. 이완석은 현재 예화랑 전신인 천일화랑을 만든, 우리나라 일세대 산업 디자이너아닙니까. 저희 집안과도 각별한 인연이 있던 분이었습니다. 생전에 아버지와도 가까우셨고 북한으로 가신 뒤에도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저희 집에 명절 때마다 오셔서 용돈을 주셨던 분이었습니다. 천일화랑 건너편이 광장시장이어서 어머니 가게도 자주 찾아 살피셨습니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입관하실 때에도 오셨던 아버님 친구분 중에 거의 유일한 외부 인사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완석이 아저씨는 정말 마음이 따뜻하고 용기가 있었던 어르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가족은 빨갱이 가족이었으니까요. 아버지가 북한에 가신 뒤로 우리 집에 찾아오는 외부인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음으로 양으로 저희 가족을 살펴주시던 완석이 아저씨가 돌아가신 뒤로는 인연이 끝났나보다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김태성 회장님이 ‘완석이 아저씨 사위’라고 하시니 얼마나 놀라고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아, 이렇게 완석이 아저씨를 다시 만나는 구나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김 회장님으로부터 소개를 받은 분이 당시 미술비평가로 한국일보에 근대미술백년사를 연재하고 있던 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이었습니다. 윤 전 관장님의 주선으로 아버지 그림은 해방 이후 처음 1984년 롯데백화점 롯데화랑 전시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신문에 기사도 크게 나고 KBS ‘문화살롱’에도 소개가 될 정도로 전시는 많은 분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제게 있어 그 전시는 홍우순이라는 어머니가 먹여 살렸던 시장판에서 임군홍이라는 아버지 속으로 저라는 존재가 옮겨간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장사를 하면서 여유가 좀 생기면 아버지 작품을 복원하고 알리는 일에 매달리게 되었으니까요. 전시가 끝난 후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 다섯 점을 기증한 것을 계기로 1985년에는 미술관에서 임군홍 특별전도 열리게 됩니다.
하지만 전시 이후 ‘임군홍’은 다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갔습니다. 일부에서 그림을 팔라는 유혹도 많이 받았지만 초창기 몇 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팔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가 보관하고 있는 100여 점이 넘는 작품들을 어떻게 할까 10여 년 전부터 고민이 많았습니다. 미술관을 할까, 기념관을 만들까, 화랑이라도 할까 별별 생각을 다 했습니다. 그러다 지난번 예화랑에서 했던 ‘밤하늘의 별이 되어 ’예화랑 45주년 기념전이 인연이 되어 이렇게 아버지 전시를 성대하게 하게 되었으니 모든 것이 다 하늘의 뜻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아들이 생각하는 화가 임군홍
몇 년 전 중국을 통해서 북한에서 가져온 아버님 그림이라며 저를 찾아온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사진 몇 장과 임군홍이 북한에서 그린 그림이라며 그림도 가져왔습니다. 현금 800만 원을 달라고 하길래 가게에 있던 돈 300만 원을 몽땅 주고 샀습니다. 그림이 가짜라는 건 저녁에 집에 가서 찬찬히 보니 알겠더군요. 다음날 그 사람에게 전화를 했더니 핸드폰이 꺼져 있었습니다. 사기를 당한 것이지만 그래도 사진 몇 장은 구할 수 있었지요.
사진 속 아버지는 환갑 때 모습이라고 하는데 양복 차림을 하셨지만 어딘가 어색하고 표정이 밝지가 않고 깊은 시름에 가득하신 표정이었습니다. 또 한 번은 시사저널이라는 잡지사 기자분이 납월북자 가족사진이라고 가져왔는데 사진 속에는 새어머니도 있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보다 덩치도 좋고 눈도 크고 아주 활달하게 생기셨더라고요. 그리고 이북에서 태어난 이복동생들도 보였습니다.
그 사진을 딱 보는 순간 평생 내가 생각하고 그리워했던 아버지는 이제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서운했던 마음도 있었습니다. 남한에 홀로 남겨둔 당신의 아내는 여덟 식구를 여자 혼자 먹여 살리느라고 그 모진 애를 썼는데 아버지는 새 가정을 꾸려서 애들까지 넷이나 낳았다니 말입니다. 그 사진으로 오히려 저는 아버지를 이제 놓아드릴 수 있겠다는 심리적 정리가 됐다고 할까요. 그림과 삶이 참으로 대단하고 멋있다는 생각도 있지만 그때 이후로는 아버지가 그리워서 눈물이 나는 일은 없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임군홍에 대한 평가도 더 객관적이 되어갔습니다. 이념적으로 분열된 이 나라 안에서 북으로 간 임군홍은 철저히 잊혀진 작가였고 평가받지 못했던 작가였습니다.
아버지 그림을 한 점 한 점 자세하게 보기 시작한 건 롯데 백화점 전시가 끝나고 난 뒤부터였습니다. 전시가 끝나고 난 뒤 얼마 후 마침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어 조금 큰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아버님 방을 따로 처음 만들어드렸습니다. 수납장도 만들고 생전에 유품도 모아놓았지요. 온도와 습도 조절을 위해 일부러 냉난방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림을 모셔놓기만 했지 아버님 작품을 볼 마음의 여유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금성출판사에서 ‘근대미술 화집’을 만든다고 사진작가가 찾아왔습니다. 저도 오랜만에 아버님 작품 한점 한 점을 꼼꼼히 살펴본 첫 번째 계기였습니다. 그 사진작가는 작품들을 보며 진심 어린 감동을 표현했습니다. 그때에야 저도 비로소 ‘아, 아버지 그림이 괜찮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먹고사는 일이 바쁘다 보니 좀처럼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볼 여유는 생기지 않았습니다.
몇 년 뒤 1996년 6월에 갤러리 도올에서 전시를 하면서 도록을 만들었는데 그때 만난 사진작가도 아주 경험이 많은 사진가였습니다. 그 사람 역시 작품을 하나하나 보더니 “임군홍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는데 와, 우리나라에도 이런 작가가 있었군요” 하면서 감탄을 했습니다. 저도 그 무렵부터는 사는 일에 좀 여유가 생길 때라 ‘이번에야말로 아버지 작품을 제대로 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각종 자료와 스케치까지 자세하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거실 중간에 이젤을 세워놓고 한 점 한 점을 가져와 ‘그림 명상’에 빠진 것은 그 즈음이었습니다. 햇빛이 거실까지 들어오는 맑은 날 낮이 되면 거실에 비치는 자연광을 배경으로 아버지 그림을 한 점씩 카메라로 찍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작품 세계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자 어느새 그림들이 제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버지와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으로 그림을 보았는데 신기하게 그림이 말하는 소리가 제 귀에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아, 이건 비 온 뒤의 마음 상태를 그리신 거구나, 이 건축물은 이래서 이렇게 작게 그리신 거구나…’. 뭘 그린 것이고 뭘 표현하고 싶었는지가 느껴졌습니다. 어느 날에는 그림 속 풍경이나 인물이 제게 질문을 걸어오는 것 같았고 저는 점점 그 질문들에 답을 하는 마음으로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예쁘고 아름다운 그림보다는 뭔가 모호하고 언뜻 보면 잘 모르는 그림들이 제게 더 많은 말들을 걸어왔습니다. 두 차례 전시 이후 아버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평론가 선생님들의 귀한 해석도 있었지만 어떤 그림들은 평론가 선생님들이 말했던 것들과는 좀 다르게 느껴진 것들도 많았습니다. 깊은 침묵과 명상 속에 만난 아버님 그림들은 하나하나가 다 명작으로 느껴졌습니다.
시장에서 송이를 팔아 약간의 목돈이 생기면 액자를 만들어 넣어 보관했고 훼손된 부분들을 하나하나 복원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원작업도 최고의 전문가에게 맡기고 싶어 국립현대미술관 보존과학실에서 일하셨고 일본에서 공부한 우리나라 최고 복원 전문가인 강정식 선생에게 맡겼습니다. 강선생도 그림에 대해 탄복을 하시는 걸 보면서 더욱더 아버지 작품 세계를 보게 되고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식민지 시대와 해방공간을 거치며 오로지 예술정신 하나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조국과 중국을 오가며 또 일본 작가들과도 교류하며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하며 너무너무 자유롭게 살다간 사람입니다. 틀과 규격에 얽매이지 않으며 화풍도 대담하게 구사했던 임군홍의 그림들을 보노라면 우리나라 근대 화가들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도 느끼게 됩니다. 이번 전시가 모두 살기 어려운 이 시절, 지금보다 더 살기 어려웠던 시절 예술혼 하나로 진정한 자유를 누렸던 임군홍 정신을 되새기는 전시가 되었으면 합니다.